가난, 희망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가

일하지만 배고픈 ‘근로빈곤층’

최근 우리 사회의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일하면서도 가난한 근로빈곤층이 늘어나고 있다. 마치 70, 80년대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속에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던 근로자의 모습이 2009년 현재도 우리주변에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속에, 가족을 부양하기는커녕 혼자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임금으로 하룰 하루를 생활하고 있다. 근로빈곤층의 현실과 그 대안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늘어나는 근로빈곤층

대학을 졸업한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윤정호씨(29.가명)는 올해 공무원 채용이 크게 줄어들 것이란 소식에 그만 시험 준비를 접었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는 없기에 기업체 채용 공고가 뜰 때마다 닥치는 대로 원서를 쓰고 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소규모 공장이 밀집돼 있는 성수동도 이젠 같지가 않다. 예전 같으면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한 판금공장들이 한창 일할 때지만 요즘은 일거리가 없어 오후 시간 때 직원들이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앉아 일거리 고민을 한다.

16년간 성수동 공장에서 오락기와 정수기 외형을 납품하며 일했다는 홍경우씨(66, 가명)는 “그동안 불황이 몇 번 있었어도 이렇게 일이 없기는 처음”이라며 “지난해 말부터 급격히 나빠지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절반은 노는 날”이라면서 “야근수당 받으며 밤 늦게까지 일하던 때가 그립다”고 말한다.

성수동의 일거리 부족은 인근 공장 퀵서비스 사무실까지 여파를 미쳤다. 이 일대 공장의 기계부품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오토바이 배달 물량도 함께 줄었기 때문이다.

천호동에 시계부품을 배달하러 간다는 이성모씨는 “성수동에 20년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하다”면서 “지난해에 하루 10∼15번 배달을 나갔다면, 요즘은 많아야 6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퀵서비스 회사에 전화벨이 이렇게 울리지 않는다는 건 이 동네 공장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 지구촌을 휩쓸며 경기불황을 예고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또 한번의 시련을 겪고 있다.

과거엔 일자리만 구하면 그래도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급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이른바 ‘근로빈곤층(The Working Poor)’은 새로운 사회문제가 됐다.

근로빈곤층이란 밤낮없이 일하지만 경제형편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의 모습은 빈곤가구층에 속한 사람들 중 적어도 반년(1년중 27주)동안 노동시장에서 일하거나 혹은 그 기간 동안 구직활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 근로빈곤층은 불안정한 노동지위와 고용불안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근로빈곤층’ 본인 자신뿐만 아니라 그에 딸린 자녀 증 부양가족의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빈곤의 악순환

지난 2008년 10월 발생한 서울 논현동 '고시원 참사'는 빈곤층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사회에 보여줬다.

이날 참사는 주차 안내와 식당일로 생계를 꾸리며 고시원에 거주하던 피의자 정 모씨가 오전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13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사건이었다. 세상 불만 가득한 정씨가 그 울분을 가시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것은 당시 고시원에 피해를 본 피해자를 역시 정씨와 같은 식당, 노점상, 일용직근로자 등 하루 벌어 먹고사는 근로빈곤층이었다.

이렇듯 하루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을 가슴에 안은 채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한편 이날 참사는 안전 사각지대로 머물러 있던 고시원와 그 체류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요즘 고시원에 고시생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일부 학원가를 제외하면 고시원에 체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이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을 준비하며 학생들이 먹고 자며 공부하던 고시원, 이제는 옛말이다. 고시원 숫자는 엄청나게 늘었고, 그 90% 이상은 근로빈곤층 등 어려운 이웃의 몫이 됐다.

고시원 체류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보증금 없이 20만 원 안팎의 월세를 내고 협소하나마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시원에서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을 벗어나 좀 더 쾌적한 보금자리로 나가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고시원 총무로 6년 째 고시원에 체류해온 조철호(가명.55세)씨도 여기에 해당된다. 조씨는 "여기에 슬픈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고시원은 구세주"라고 말한다.

조씨 역시 이 슬픈 사연의 한 주인공이다. 조씨는 지난 15년 간 은행에서 일해 온 인재였으나 IMF 외환위기로 1998년 명예퇴직을 했다. 이후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했으며 이내 가족과도 헤어져 홀로 고시원에 남았다.

조 씨는 6년 전 고시원에서 잠자리에 들었던 첫날밤 "창문 없는 방에 불끄고 누워있으니 꼭 관 속에 들어있는 느낌 이었다"고 고백했다.

경제한파, 어려운 살림살이

고시원 생활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 해도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못하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의 반지하방에서 사는 유상진(56)씨는 이달에 낼 방세에 한숨을 쉬고 있다. 이달 중순까지 월세 13만원을 내야 하는데, 유씨 손에는 8만원이 전부다. 남은 시간 동안 부족한 5만원을 방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속칭 ‘노가다’를 나가며 생계를 유지해온 유씨는 요즘 건설경기 침체로 그마나 일손도 끊겼다.

유씨는, 결국 석 달 전부터 고철·고물 수집으로 생계수단을 바꿨다.

하지만 그마저도 경기 한파를 피해 가진 못했다. 철강업체들이 최근 생산을 줄이면서 고철값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유씨는 “한 리어카를 채워봐야 4천원 정도라, 하루 두 끼를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해도 부족한 월세를 채우기가 힘겹다”고 하소연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김영호(60.가명)씨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방에 누워 있어야 하는 아내와 둘이 이곳에 살고 있다. 김씨는 “이번 달 월세 15만원을 지난 8일 냈는데, 다음 달엔 자신이 없다”고 했다. 전봇대 전단지를 떼는 공공근로로 월 60여 만원을 벌던 김씨는 지난 6월 일하다 그만 몸을 다쳐 병원신세를 졌다.

하지만 병원에서 퇴원한 후 김씨는 더 막막한 생활을 맞이하게 됐다. 병원입원기간동안 공공근로 신청은 이미 접수가 끝나 있었다. 김씨는 “동자동에서도 쫓겨나면 다음 단계는 노숙인데, 둘다 몸이 성치 않아 갈 데가 없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경기침체의 여파는 이렇듯 저소득층의 주거권마저 위협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집값과 전, 월세값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저기 한 몸 누울 방 한칸이 없는 이들에겐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부동산 거품으로 서울시내 아파트 전셋값이 몇 천만원씩 떨어졌다 해도, 이들에겐 방값 1만원의 여파가 더 크다.

동자동에서 ‘쪽방 건물’을 운영하는 강영임(52)씨는 “월세를 마련하지 못해 방을 빼는 이들이 과거엔 한 달 평균 5세대 정도였는데, 최근엔 2배 정도 늘었다”고 말한다.

강씨는 “여기가 그 사람들에게 마지막 버팀목이라는 건 알지만 나도 살아야 하니 월세를 못 내면 바로 내보내곤 한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 심화

한 통계에 따르면 소규모 생계형 자영업자나 생계형 근로자수가 25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성장산업과 사양산업간, 대규모 사업장과 영세사업장 간의 임금격차가 심화시켰으며 비정규 저임금노동자, 영세자영업자, 실업자 등을 양산시켰다.

이 결과 노동의 가치보다 대박의 꿈들이 이들 빈곤층 전체를 지배하는 경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실제로 경기불황인 지금, 일자리 찾기보다, 경마장, 로또, 강원랜드 등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한 관계자는 "근로빈곤층은 대체로 음식업, 도매업, 숙박업 등 비정규직, 영세 제조업체, 생계형 자영업자 종사자들"이라며 "이는 대부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자들이 차린 것"이라고 경제 악순환의 원인을 지적했다.

그는 "이들에 대한 대책은 실무자들도 모를 정도로 다양하게 나오고 있지만 '왜 근로빈곤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하며 “대책은 있으나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셈”이라 지적했다.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도 2008년 11월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주최로 개최된 토론회에서 2007년 현재 우리나라 저임금 고용비중은 32.3%. 2000년 28%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밝혔다.

윤 교수는 “빈곤상태가 지속될 경우 이혼, 질병, 범죄, 알콜·약물중독, 청소년 문제 등 각종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야기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저임금·고용문제는 개인문제일 뿐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맥락에서 취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중위임금의 50% 이하인 초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2000년 12.2%에서 2007년 16.3%로 증가했다” 며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가 급속하게 회복됐지만 그 성과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해 저임금노동자 비율은 13개 OECD회원국 중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저임금 고용비중이 거의 안정 상태를 보인 반면 한국은 상승추세에 있다.”고 언급했다.

윤교수는 그 대안으로 “저임금고용 해소를 위해 무엇보다도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최저임금 현실화, 저임금노동자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개선, 교육훈련 강화,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양육 양립 지원 강화” 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여성이 가장인 경우 빈곤 더 심해

이날 토론회에 함께 참여한 보건사회연구원 박능후 연구위원도 “외환위기 이후 빈곤층이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비율도 급증하고 있다”며 “이는 저소득 계층을 좌절시키고 희망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박 연구원은 “여성 가장은 빈곤은 보다 취약하다”며 “2008년 현재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구는 329만3,000개로 전체 가구의 20.1%로 다섯 곳 중 한 곳을 차지한다.이중 어머니 혼자 자녀를 데리고 사는 곳은 2005년 현재 108만3,000가구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한편 맞벌이 여상인 경우 기혼 여성에게 돌아오는 일자리의 대부분이 급여가 낮고 고용 보장이 안 되는 임시 일용직이란 점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노동연구원 은수미 연구위원은 "한국 여성들은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뒀다가 뒤늦게 재취업을 하는 M형 패턴을 보인다"며 "오랜 공백 때문에 이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다보니 근로 조건이 나쁜 단순직에 종사하게 된다"고 말했다.

2008년 상반기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상담 창구를 찾은 실직ㆍ빈곤 여성 845명을 조사한 결과도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조사결과 절반이 가족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었으며 상담 내용 또한 구직 상담(69.3%)과 직업 훈련(17.8%) 등 취업 관련이 압도적이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임윤옥 정책실장은 "저임금으로 가족 생계와 양육을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여성 가장들이 빈곤의 핵심층"이라며 "이들에게 안정된 일자리와 양육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전문가들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의 급속한 확대가 근로빈곤층 양산의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으며 일을 해도 급여가 낮고,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이 많기 때문에 가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한편 보건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빈곤층에 대한 지원은 가급적 초기에 이루어져서 빈곤층의 어려움을 극소화하고, 국가재정을 효율화해야 한다.”고 현실을 말했다.

이를 위해 “빈곤의 약 69%는 3년 만에 종료되는 단기빈곤으로, 제도에 안주하려는 도덕적해이를 방지하고 빈곤이 장기화되지 않도록 빈곤진입 초기에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조기에 빈곤에서 탈출해 노동시장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라 설명했다.

이정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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