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더 이상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어르신 방송단이 있다. 관악 인터블루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노인과 사회의 소통을 위해 매일 오전 6시, 추억이 깃든 음악을 띄운다. 자신의 일을 갖고 당당히 사회생활을 하는 관악 인터블루 방송국 1기 아나운서 안혜옥(70) 어르신을 만났다.

최초의 노인 방송국 ‘인터블루’
매일 아침 라디오 주파수를 100.3Mhz에 맞추면 노인들이 들려주는 유쾌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
“인터블루는 노인과 노인, 노인과 젊은이, 노인과 사회 간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노인을 위한 방송입니다.”
인터블루란 인터넷의 ‘인터’와 푸르다, 라는 뜻인 ‘블루’의 합성어로 언제나 푸른 청춘이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일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취감을 느끼고 활기찬 노후 생활을 즐기고 있는 안혜옥 아나운서는 인터블루 방송국에서 진행과 엔지니어링을 맡고 있다. ‘쾌지나 청춘’ 화요일 방송을 진행하는 그는 음악 선곡과 대본 작성을 직접 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현재 1기는 7명, 2기는 4명이 있습니다. 나이는 6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고요. 1기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자기 개성에 따라 방송을 하고 있어요. 2기는 하루 세 번 시립관악노인종합복지관 관내방송을 하고 있고요.”
관악 인터블루는 관악공동체라디오인 관악FM과 시립관악노인종합복지관이 2007년 2월 21일 맺은 노인 계층간 방송 접근권 강화를 위한 협약으로부터 출발했다. 미디어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인 미디어 교육으로, 어르신들은 1년 동안 시립관악노인종합복지관 내 컴퓨터실에서 관악FM의 PD들에게 라디오 방송과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3월 26일에 복지관 관내 컴퓨터실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6개월간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연장이 되어서 1년간 배우게 됐지요. 교육 기간 동안 관악FM에서 장비들을 다 가지고 오셨어요. 조립을 했다가 갈 때는 다시 가지고 가셨죠. 안병천 국장님하고 PD분들이 교육을 해주셨어요. 교육을 마치고 이듬해 2008년 3월 12일에 처음 개국을 하게 됐어요. 개국 축하 공개 생방송을 하고 3월 17일에 정규방송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복지관 관내 방송을 하고 있었던 안 아나운서는 관악FM 국장님의 권유로 지원을 하게 됐다.
“노인들의 손으로 직접 만드는, 노인을 위한 방송국을 개설할 테니 PD, 엔지니어에 관한 교육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신청하게 됐죠.”

끊임없는 노력
안 아나운서가 방송 활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라디오 대본에 띄어 말할 자리를 표시했어요. 크게 말해야 하는 부분을 체크해서 여러 번 읽어봤습니다. ‘사운드 퍼지’라고 소리를 편집하는 도구가 있어요. 그걸 집에 있는 제 컴퓨터에 깔아놓고 녹음해보고 다시 들어보면서 연습했어요.”
다른 어르신들은 기계를 처음 접해 힘들어했지만 안 아나운서는 인터넷 활용, 한글 문서 작성 등의 컴퓨터 사용법을 미리 배워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쉽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하루에 단어 하나라도 꼭 외울 정도로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라디오 관련 용어도 어렵지 않았다.
“콘솔이 조금 생소했어요. 아무래도 접하기 어려운 기계니까요. 그래도 컴퓨터 배워둔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메일 사용법을 익혀두니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요. 전에는 게스트를 모시고 했었거든요. 게스트에게 미리 질문을 보내고, 답을 받고. PD에게도 메일을 보내 질문을 했어요. 제가 61살에 처음 컴퓨터를 배웠거든요. 그때는 이 나이에 컴퓨터 배워서 뭐하랴 싶었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지 몰랐어요.”
늦은 나이에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남들보다 노력한 덕분에 수월하게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일 큰 문제는 대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한 시간짜리 방송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시간을 나눠야 되잖아요. 음악하고 시간을 맞춰야 해요. 선곡이 어렵더라고요. 몇 분짜리 곡인지 적어서 시간을 합해야 하거든요. 대본 소재 찾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주제가 정해지면 자료를 찾아 취합해서 선곡한 음악과 멘트가 어울리는지 들어 봐야 돼요. 제목만 듣고 참 잘 어울리겠다 싶어 결정했는데 내용을 세세히 들어보면 안 맞을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 시간이 많이 걸려 곤란했지요.”
안 아나운서는 항상 방송에 대해 생각한다. 일상에서 방송 소재를 찾다보니 주위에 있는 사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나운서가 된 이후로 무엇이든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그는 나이 들어서도 공부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제가 라디오를 참 많이 들어요. 아침에 좀 일찍 깨는데, 일어나면 라디오부터 틀어요. 집에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라디오만 듣기도 해요. 9시부터 잠들 때까지는 주로 음악 방송을 들어요. 일을 하면서 전보다 음악 방송을 많이 듣게 됐어요. 어떤 음악을 내 방송에 사용할까 생각해야 되거든요.”
가사가 와 닿거나 멜로디가 인상적인 음악이 있으면 청취자와 함께 듣기 위해 메모를 해놓는다는 그는 좋은 글귀를 찾기 위해 신문 스크랩도 빼놓지 않는다. 늦깎이 아나운서이지만 라디오에 대한 열정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다.

문화의 꽃을 피우다
처음에 그는 너무 많은 자료를 모아 그것을 가려내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생겼다. 그리고 마이크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정도로 라디오가 편해졌다. 그렇지만 능숙하게 진행을 하기까지 실수도 많았다.
“2008년 가을에 서울대 전철역 앞에서 공개 생방송을 했었어요. 저는 그때 다른 분하고 1부 공동MC를 보고 있었는데, 2부에 나올 가수가 자기 스케줄이 바빠서 갑자기 그냥 나온 거예요. 소개도 안 했는데. 그 가수를 소개할 멘트는 2부 진행자가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했는데 그냥 무대로 나가서 노래를 하더라고요. 노래 끝나고 소개를 했었는데 좀 당황스러웠어요.”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으면 다 빠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자신도 조금씩 성장해왔다는 안 아나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나아졌다고 할 때 용기를 얻는다. 아나운서로서의 정체성을 찾은 것도 달라진 점 중 하나이다.
“라디오 아나운서는 디지털 시대 문화의 꽃인 것 같아요. 물론 꽃은 혼자 피지 않죠. 땅 속에서 뿌리가 많은 역할을 하듯 PD, 엔지니어, 작가 등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좋은 내용이 있어도 그것을 전달하는 아나운서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전 아나운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안 아나운서는 마이크 앞에 앉으면 얼굴에 미소를 띠고 편하게 방송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방송 중 목소리 힘이 떨어지는 때가 있어 발음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는 그는 요즘 목 관리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일하기 전에는 목소리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는데 방송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갈라지거나 목이 잠기는 경우가 많아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나눔을 전하는 삶
안 아나운서는 인터블루에서 방송뿐만 아니라 자원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인터블루는 전국 노인자원봉사활동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와 함께 동료들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한 덕분이다.
“인터블루 활동은 제게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아나운서로 지내며 일도 하고, 가진 것을 주변에 나누며 좋은 일도 할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함께 방송을 하는 1기 친구들과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방송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가진 동료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회식을 하고 여행도 다닌다.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거워요. 이제는 2기 후배들이 생겨 든든하기까지 합니다. 보수교육을 받거나 방송제를 할 때 후배들을 가끔 만나는데, 우수하고 실력 있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는 선배로서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
안 아나운서는 청취자들과의 소통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방송에서 자신을 ‘화요일의  친구’라고 소개했다. 사람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기 위해 친근한 아나운서가 되길 자처한 것.
“방송을 진행하면 할수록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직접 대본을 쓰고 말로써 전달하게 되니 책임감이 막중하죠. 언젠가 한 청취자가 제 방송이 어렵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때부터 편하면서도, 듣고 나면 얻을 것이 있는 굵직굵직한 방송을 하기로 작정했어요. 특히 마이크 앞에서는 제 자신을 다 내보이려고 하고 있어요. 청취자들과의 소통을 위해서죠.”
혼자만의 방송이 아닌 모두를 위한 방송. 이것을 위해 그는 사연과 신청곡 코너를 활성화할 작정이다. 그는 노인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할 수 있는 코너가 필요하다고 여겨 어르신 청취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나도 한마디’ 코너도 마련하려 한다. 방송에서 노인일자리 정보를 소개하는 것도 사회에 참여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오늘 아침에는 사회복지사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도시락 배달과 같이 재가복지업무를 담당하는 직종을 소개했어요. 환경미화원이나 주차관리 등의 단순 노동도 괜찮지만, 이왕이면 과거 전문지식을 살릴 수 있는 일거리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덧붙여 노인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줬으면 하고요.”
안 아나운서는 앞으로 노인 일자리 정보뿐만 아니라 노인들에게 필요한 문화정보도 체계적으로 전할 계획이다. 그가 진행하는 ‘문화의 숲을 거닐다’ 코너는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등의 소개를 통해 노인들이 문화체험을 할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또 다른 전성기를 위해
안혜옥 아나운서의 동료들은 공부하던 것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다. 다들 방송국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안 아나운서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려 한다.
“현재 관악 문화원에서 문학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거기서 일 년에 한 번씩 책을 내고, 발표회 및 시 낭송회를 해요. 또 ‘큰 나무 기자’라고 석 달에 한 번씩 신문도 내고 있어요. 문화원에서 문학 수업을 받고 구청에서 원어민에게 직접 배우는 영어 공부도 계속할 참이에요.”
그는 즐거운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노후대책을 경제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돼요. 수입이 있든 없든, 보람 있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을 하나씩 가져보는 게 필요해요.”
안 아나운서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노년의 삶을 아름답게 가꿀 작정이다. 청취자와 진솔한 노년의 목소리를 주고받기 위해 그는 오늘도 행복의 사연을 전달한다.

김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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