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푸르른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서는 청보리처럼 농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노래를 부르는 여성농민 노래패가 있다. 전북여성농민노래단 ‘청보리사랑’(단장 윤애경)은 농민 노래패로서, 농민정서에 맞는 노래로 농민 문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

윤애경 단장, 박연희, 김은희, 오은미(왼쪽부터)

농민들 애환 노래로 위로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노래하겠다’는 뜻을 모아 농사꾼 아줌마들이 1995년 창단한 전북여성농민노래패 ‘청보리사랑’은 농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노래로 표현한다.
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3년 노래일꾼 수련회에서였다. 이후 노래를 통해 농민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여성농민의 지위를 확보한다는 목적아래 95년 발족, 서울 경희대에서 열린 전북농민대회에서 데뷔했고 96년 1집 앨범을 내면서 노래단을 ‘청보리사랑’이라고 이름 지었다.
노래단은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기본, 무엇보다 여성농민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여성농민회 중책을 맡고 있는 단장 윤애경(43), 김은희(42), 오은미(46), 박연희(45)와 신입단원인 박인춘(37), 김영숙(33) 회원 등 6명이 그들이다.
단원의 면면을 보면 다들 감투 두어 개씩을 맡고 있다. 윤 단장은 80여 마리의 젖소를 키우는 한길목장 안주인으로 매일 소젖을 짜야하는 바쁜 일상이지만 순창군 여성농민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오은미 씨는 쌀농사를 지으며 민주노동당 도의원으로, 박연희 씨는 벼농사와 축산을 하며 정읍시 여성농민회에서, 김은희 씨는 군산 여성농민회에서 활동한다.
매년 30~50차례 전국을 누비는 노래단은 군산과 정읍, 순창에 흩어져 살고 있어 농한기 때 집중적으로 강도 높은 연습을 하면서 각종 농민대회와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한 노력은 정말 뼈를 깎는 고통입니다. 저희는 기량을 높여 예술성 있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본이고, 그 외에 농민의 삶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탓에 더욱 그렇죠. 다만 저희가 자신 있는 것은 농민의 삶이 우리의 삶이기에, 그분들께 적어도 같은 처지에서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기쁨을 드리며 슬픔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연이 있을 때는 농한기 때의 연습을 기본으로 같이 이동하면서 차안에서 연습하고 무대 뒤에서 율동을 맞추는 정도다. 대신 리허설은 빠뜨리지 않고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원칙이다.
“무대에서 대중들을 만나다보니 항상 단련돼야 해요. 항상 공부해야하고, 더 부지런해야 된다는 걸 느낍니다. 물론 집안 식구들한테도 더 노력해야 하구요. 흙 장아찌가 되서 일하다가도 아님 소변(便)을 열심히 치우다가도 공연이 있을라치면 얼른 분단장하고 나가야 하니요. 강철은 괜히 단련되는 것은 아니겠지요?(웃음)”

3집 앨범 발매, 어느덧 경력 16년차
어느덧 이들은 경력 16년차의 중견 노래패로 성장, 앨범도 3집까지 발매했다. 지금까지 45곡을 발표했고 이 중 7곡은 자신들이 직접 작사까지 했다. 도농민회의 지원과 멤버들의 쌈짓돈 한 푼, 두 푼을 모아 스튜디오를 빌리고 음반도 제작했다.
“농사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농민마음을 읽어주어서 그런지 아님 농민노래단이 우리뿐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저희가 드린 사랑보다도 받는 사랑이 더 많지요.”
사실상 제대로 된 농촌문화가 없는 현실에서 이들의 음반은 초판 2000장이 나온 지 보름 만에 품절이 되고 다시 3000장을 찍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이에 힘입어 3년 뒤에는 단원들이 직접 가사도 쓰고 공동 창작도 하여 청보리사랑 2집 테이프와 CD를 제작했다.
농업문제가 부각되는 시점에 농업의 주체인 농민의 삶과 소리를 노래로 전하되 1집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흥얼거리고 감동을 줄 수 있는 희망적인 노래를 만들자는 것이 2집의 테마였다.
‘청보리사랑’ 노래단의 2집 앨범에 실린 ‘친정 엄마’란 노래는 당시 임신 중이던 단원이 만든 것으로, 무남독녀 외동딸인 그가 시골로 시집을 오면서 겪게 된 심정을 담았다. 

‘농촌에 시집간다 말리시던 울엄마/오랜만에 달려온 딸 맨발로  반기네/뱃속 아가 건강하냐 시집살이 편하냐/정신없이 물어보다 목메이시네/나 이제 알겠어 울엄마의 그 마음/남모르게 아파하며 긴긴 밤을 보냈지/울엄마 그 마음 천번만번 알겠어…’

농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흥겹고 신명나며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는 노랫말에 공연장은 금방 뒤집어졌다가 어느새 숙연해지곤 한다.
 “‘친정 엄마’는 농촌에 딸을 시집보낸 엄마의 심정을 다룬 노래인데, 부르는 저희도 뭉클하고 들으시는 엄니(어르신)들도 훌쩍 하실 때가 더러 있어 무대에서 목이 매여서 노래가 안 나오기도 합니다.”
노래단은 앨범작업을 하면서 농민의 노래가 더욱 필요하다고 느꼈다. 문화적 욕구를 채우고 건강한 농촌의 삶을 노래로 알리고픈 마음이 생긴 것.
“농민이라고 해서 문화적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노래 부를 기회를 갖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자신의 삶 속에서 나온 노랫말과 곡조들이 그들을 스스로 격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청보리사랑’의 노래는 바로 이러한 촌부들의 마음에서 우러나고 있다.

끈질긴 생명력, 가족들 배려 덕분

농한기 때 집중적으로 연습한다.

노래단은 각 시군영농발대식공연, 남북농민 통일대회 공연, 홍콩 농민투쟁, 각 시군(여성) 농민회 총회 등 공식 행사부터 회원들 칠순잔치 등에도 참여해왔다. 또한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노래를 잘 불러서 초청되는 것은 아니지만 농민 형제들이 자신의 삶을 노래로 듣고 잠시나마 노고를 잊는 것에 감사하고 자부심도 느낀답니다.”
물론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보통 여성농민으로서 1년에 30여 차례 이상의 공연활동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농약 칠 때는 시끄러운 경운기 옆에서 맘껏 소리도 질러보고, 소젖 짤 때는 아예 노래 테잎을 틀어놓고 소들과 박자를 맞추고, 고추를 따며 김을 매며 흥얼거린다.
무엇하나 손쉽게 털어 버릴 수 없는 무수한 역할들을 묵묵히 감내하며 한데 어우러진 노래를 선사하기 위해선 질긴 생명력이 필요했고, 농사를 지으며 흙에서 얻은 생명력은 늘 이들 활동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가족들의 배려 역시 크나큰 힘이 됐다. 이들이 공연을 하거나, 음반 작업을 할 때 또는 노래연습 등으로 농사일에 빈자리를 채워준 것도 가족의 몫이다. 남편, 자식, 시부모, 주변의 크고 작은 배려가 마침내 농민들의 한과 정서에 맞는 노래를 탄생시킨 것.
“바쁜 농사철에 아기를 맡아주고 농사일도 빼주며 노래 만들기를 말없이 거들어준 남편의 도움이 정말 컸어요. 지금도 무대 아래에서 기쁘게 지켜봐주는 변함없는 지원자랍니다.”
한편 새 음반이 나올 때마다 이들 가족은 가장 까다로운 평가자가 되기도 한다.
“연습이나 앨범 작업 때마다 농사일에 빈자리를 채워주느라 식구들이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출산의 고통을 지나 새로운 음반으로 나올 때면, 가족들은 가장 무서운 비판가이자 조언가가 되곤 하지요.”

靑보리 사랑이 黃보리 사랑이 될 때까지
지난해 청보리사랑은 15주년을 기념해 콘서트를 열었다. 비록 멋진 콘서트장은 아니었지만 여성농민회원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전국여성농민회 총연합의 한마당 잔치와 전북연합의 연말 행사에서 이들은 남은 역량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저희는 농민들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즐거웠고, 우리 여성농민들은 공감해서 즐거웠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청보리사랑을 아껴주시는 여러 농민형제들, 여성농민회 동지들, 그리고 우리 가족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15주년 기념 콘서트

이어 윤애경 단장은 열렬한 농민들의 격려와 지지 속에 우쭐하거나 초심이 변색되지는 않았는지, 바쁜 농사일정과 또 다른 일상 활동들 속에서 공연활동에 최선을 다 못하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되돌아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털어 놓았다.
이제 청보리사랑은 농민운동 현장에 함께 가는 노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록 몸과 마음은 바쁘지만 농민운동의 발전과 함께 전진하는 노래단, 농민형제들의 자랑으로 남기 위하여 청보리사랑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청보리 사랑이 황보리 사랑이 될 때까지 농민들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모아 농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래하고 싶어요. 청보리 사랑은 뒷걸음 없이 조금씩 전진하겠습니다.” 

배샛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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