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은 씨앗을 땅에 뿌리면서부터 시작된 농업의 역사를 만들어 왔으며 국민의 생명과 같은 안전한 먹을거리의 생산을 책임지고 있다. 생산의 주역이자, 삶의 주인으로 지난 20여 년의 역사를 만들어온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장 김경순)을 찾았다.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 ‘여성농민이 행복한 농촌’을 만들기 위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의 행보가 거침없다.
1980년대 만들어진 여성농민운동 지원단체 ‘땅의 사람들’이 쌀, 고추, 소 등 농축산물 생산비 보장과 수입개방 반대, 수세, 의료보험료, 적십자회비, TV시청료 등 납세 문제를 갖고 투쟁해온 성과로 1989년 전국여성농민위원회가 창립됐다. 1992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으로 개칭한 전국여성농민위원회는 ‘농가주부’, ‘농촌부녀자’로만 불렸던 여성농민들이 생산주체자로서의 ‘여성농민’을 호칭으로 부여, 여성농민만의 독자적인 조직을 꾸려 그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코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활동은 ▲자주평등세상 실현 ▲쌀 값 보장 ▲성 평등한 농촌 실현 ▲씨앗을 지키는 여성농민 권리 실현 ▲생산 가공 유통을 현장의 농민에게 ▲국민에게 안전한 먹을거리 보장 등 여성농민의 전국적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여성농민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향상과 여성농민의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고 이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화, 조국통일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여성농업인도 ‘전문인’ 대우 절실

 
전여농의 신지연 사무국장(36)은 대부분의 농촌 여성들이 ‘농업인’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대부분의 여성이 본인 명의의 농지를 갖지 못한 채 남편 소유의 농장에서 비공식적으로 일하고 수입도 따로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농업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농업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성농민들이 농업 생산의 주체로서 그 이름에 걸맞은 권리와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농촌의 모습입니다.”
여성농민은 살림과 육아, 자녀 교육, 시부모 봉양에 농사일까지 도맡아 해내면서도 정작 본인 명의의 밭 한 뙈기도 갖기 힘든 현실인 것이다.
실제 8년간 농사일을 해온 신 사무국장은 “면단위에는 보육시설이 없어서 농사를 짓고 자식을 돌보며, 살림까지 도맡아야하는 농촌 여성의 삶은 고달프다”며 “어린이집이 있는 읍의 경우 이동거리가 멀어서 아이를 맡기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도시 직장 여성의 경우 출산하면 유급휴가를 갈 수 있지만, 농촌 여성들은 마음껏 쉴 수도 없다.
신 사무국장은 “농촌 여성을 그냥 주부, 혹은 농사일을 돕는 ‘보조자’가 아닌 독립적인 직업인으로 인정해주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다. 덧붙여 “여성농업인들이 트랙터 같은 농기계 사용법도 배우고, 쉽게 빌릴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농협 조합원 수에서도 여성은 밀린다. 2008년 당시 전체 농협 조합원 중 여성 비율은 29.0%에 불과했으며, 여성 대의원의 수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14%(1만165명)에 그쳤다. 여성 임원 수는 전체의 5%에도 못 미치는 4.0%(359명)였다.
신 사무국장은 “농협 조합원이 되려면 100만 원 가량의 출자금을 내야 하는데, 경제권이 없는 농촌 여성들에게는 큰 부담이어서 선뜻 조합에 가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농민 정성, 소비자와 만나
‘우리 텃밭(제철 꾸러미 공동체)’은 전여농의 예비 사회적일자리 사업장으로, 현재 전국에 6개의 지역 사업단이 꾸려져 있다. ‘얼굴 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함께 만드는 ‘우리 텃밭’ 사업은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텃밭에서 재배한 후 근거리 소비자들에게 공급해준다.
한 달에 네 차례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담아 소비자에게 택배를 발송하여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 내용물은 10개 품목 안팎으로, 두부2모·유정란10알·잡곡1가지·신선채소 2~3가지가 기본 품목이며, 계절이나 시기별로 제철과일·버섯류·서류·묵나물 등이 구색을 갖춰 담긴다. 여기에 장류·절임류 등 발효 식품과 김치·나물무침 등 사업장에서 직접 만든 반찬도 한 가지 이상씩 포함된다.
“제철 채소는 워낙 다양한지라 저희가 택배로 담아 보내드리면 고객이 모르시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토종 먹을거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이죠. 그래서 택배를 보낼 때마다 친절히 편지를 동봉해서 보내고 있어요. 일주일치 건강 식단을 짜서 보내는 거죠. 레시피(조리법)도 함께요.”
이렇게 월 4회 택배로 발송하고 받는 비용(회비)은 10만원(택배비 포함). 가격이 적당한데다 안전한 농산물을 직거래로 이용할 수 있어 소비자 회원들은 대만족이다. ‘텃밭’의 인터넷 카페에는 칭찬 일색의 댓글이 꼬리를 물고 있으며, 각종 채소나 나물을 이용해 만든 요리법을 소개하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한 방송프로그램에 ‘우리 텃밭’ 사업이 소개된 뒤로는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등 대중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덕분에 첫 꾸러미를 받은 소비자는 10여 가구 정도였지만, 그 수가 꾸준히 늘어 지금은 각 지역마다 30가구 이상에게 꾸러미를 보내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

토종 종자는 희망의 씨앗

텃밭 사업과 함께 토종 씨앗 지키기 운동도 활발하다. 예전엔 가을걷이가 끝나면 씨앗을 갈무리해 다음해 봄에 파종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농민들이 다국적 종묘회사에서 묘종을 사서 농사를 짓고 있다.
“개량종은 물과 농약, 비료에 반응을 해요. 빨리 자라니까 물과 비료도 많이 먹고 농약도 많이 치죠. 토종은 상대적으로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아요. 우리 잡곡은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고 가뭄에도 견딜 수 있죠. 투입재도 덜 들어가고요.”
신지연 사무국장의 말에 따르면 연간 사라져가는 토종 씨앗은 300여종. 토종 씨앗이 사라지고 다국적 종묘 회사의 시장 지배력이 높아지면 씨앗값 상승에 따른 곡물가 폭등은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토종씨앗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먹거리 안전을 지키는 기반이자, 종묘회사들에 의해 거의 지배당한 우리 농업이 그 족쇄를 끊고 기사회생할 수 있는 미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토종씨앗은 기후에 적응시키면서 채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 지원은 미미하고 농민의 힘만으론 성공하기 힘들죠. 이에 전여농은 토종씨앗 지킴이단을 만들고 1인 1종자 운동을 펼치고 있어요.”
전여농은 토종 씨앗의 중요성을 알리고 의미를 함께 공유하고자 ‘토종 씨앗 지키기’ 회원 모집하고 있다. 농민들의 인식개선 및 확산을 위해 시민단체 등과 연대한 교육활동도 벌이고 있다.

국민 농업시대 열어야…
자본주의·가부장제 사회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당하던 여성농민들이 스스로 조직·교육·투쟁하고 정책을 만든 여성 농민운동이 올해로 21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학교급식 실현, 농가도우미제도 도입, 여성농업인육성법과 조례 제정 등 여성농민의 지위향상과 권리 보장, 그리고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자유무역협정(FTA) 반대투쟁,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투쟁, 유전자 조작식품 반대투쟁처럼 싸워야 하는 일도 많았다. 또 토종씨앗 지키기 사업, 식량주권과 국민건강 지키기 운동, 지역 먹을거리 정책 생산, 대안농정 연구처럼 식량위기 시대에 농업이 갈 길을 고민하고 연구하는 일도 계속 했다. 여성농민 정치세력화를 조직적으로 이뤄낸 것 역시 괄목할만한 성과다. 모두 전여농의 뿌리와 줄기인 시·군·면 여성농민 회원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전여농은 ‘생명과 식량주권’을 지키는 일이 더 이상 농민이 홀로 떠맡을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식량주권’, ‘국민농업’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농업은 농민만의 것이 아닙니다. 농업은 전국민이 함께 벌리는 국민운동(national campaign)인 것입니다.”
여성 농민 공동체의 건강함을 담으려 한 전여농은 이제 농민들을 위해 지역농업을 재편해 본래 기능을 회복하면서 국민밥상을 지켜내겠다는 각오다.
전여농 창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의 여성농민 50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김경순 회장은 “전여농은 지난 20년 동안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비롯해 여성농민의 지위향상과 권리 보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면서 “그러나 여성농민으로 농촌에 살아가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다. 앞으로 이 산을 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토종 종자를 지키는 일과 국민들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데 앞장서자”고 말했다.

우리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진정한 대지의 어머니로 기억될 수 있도록 지난 20여 년간 녹록치 않았을 그녀들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 

배샛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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