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나이 65세. 구부러진 허리가 펴지고, 주름진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서린다. 주름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면 어느새 나이를 잊는다. 잃어버린 세월이 다시금 무대에서 피어나는 순간이다. 무대에서 인생의 황혼을 불사르고 있는 실버 연극팀 ‘뜨는 해’를 만났다.

장준례(80),최은희(65),이명옥(56),임영월(64),최현수(59)

 

“저는 쓰레기 대장을 물리치기 위해 마법의 소리를 연주하러 온 요정입니다!”
평화로운 지구에 쓰레기 대장이 나타나 지구 여기저기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무지개 요정과 정의로운 개구리가 나타나 쓰레기 대장을 물리쳤다.
이들의 활약을 지켜보던 어린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지난달 11일 오전 11시 부천시오정노인복지관(관장 박노숙) 4층 강당에서 연극팀 ‘뜨는 해’가 이날의 관람객인 어린이들을 맞아 환경뮤지컬 공연을 선보였다. 정글을 연상케 하는 무대를 배경으로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배우들이 한 시간 동안 연기를 펼쳐 보였다. 도깨비와 같은 요란한 분장과 코믹한 연기는 아동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온누리 어린이집에서 온 이석영(6) 군은 “머리가 알록달록한 모습이 재밌다”며 즐거워했다.

‘악바리’ 할머니 4인방
지난 4월 첫 공연을 가진 연극팀의 환경뮤지컬 ‘쓰레기 괴물과 환경지킴이’는 지난해 ‘현대자동차 친환경마을만들기’ 선정 사업으로 진행된 공연이다. 지구 오염의 심각성과 환경을 지키는 것이 왜 소중한지를 어린이들에게 알려주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뮤지컬배우 강미자 씨가 연출을 맡았다. 아동극답게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대사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만화에서 흔히 볼법한 “악당을 물리쳐라”는 등 유치하다면 유치할 수 있는 대사. 거기 더해 엉덩이를 흔들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등 배우들의 코믹한 연기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조차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출연배우 가운데 최고령자인 장준례(80)씨는 ‘졸병’ 역을 코믹하게 연기해 관람객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에 관객들이 웃어줄 때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지난 5년간 어린이집 국악강사로 활동해온 장 씨는 지난해 ‘현대판 마당극 흥부놀부전’에 출연하며 늦깎이 배우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 열성은 여느 프로 배우들 못지않다. 이경옥 사회복지사는 “졸병 할머니는 무대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한다”면서 “종종 다칠까봐 불안할 적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장 씨뿐이 아니다. 임영월(64), 최은희(65) 그리고 막내인 이명옥(56) 씨를 비롯해 총 4명의 할머니 배우들은 스스로를 ‘악바리’라고 칭한다. 무대연출가 최현수(59)씨는 “뮤지컬을 시작할 때는 9명이 넘는 배우들과 스텝이 있었지만, 모두가 떨어져 나갔다”면서 “남은 사람들은 인내심과 끈기가 강한 이들 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4인으로 구성된 연극팀은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환경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게 하는 연극을 통해 당대 어린이과 어른이 동시에 지녀야할 가치관을 전달하고 있다.

노력 끝에 즉흥연기 ‘생생’
연극팀은 현재 배우 4명과 스텝 1명으로 팀을 꾸려 매주 1회씩 복지관 강당에 모여 연습을 하고 있다. 이때 단원들은 연기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식의 의견 교환을 통해 무대에서 최고의 호흡을 자랑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사 외우기도 쉽지 않았다. 춤을 추려면 몸도 따르지 않았다. 서툰 연기에 젊은 연출가에게 지적당하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4개월간 동고동락하며 갖가지 고비를 넘긴 이들은 무대를 향한 열정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최고령 장준례 씨는 목관리를 위해 평소에도 수건으로 목을 감고 다니며, 목소리가 작은 이명옥 씨는 집에서도 발성연습을 한다. 임영월 씨는 거울을 보며 눈물 연기를, 최은희 씨는 바쁜 식당일 중에도 연기연습을 빠지지 않는다. 집에서도 대사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은 단원 모두의 일상이 됐다.
최현수 씨는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는 기본적인 틀이 잡혀, 언제든지 공연에 무리가 없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쓰레기 대장, 졸병과 개구리 역을 맡은 3인방은 즉흥적으로 대사를 만들어내는 등 완전히 역할에 동화됐다는 전언이다.
팀의 최고령자인 장준례 씨가 단원들에게 ‘졸병’이라고 불리는 것 역시 그만큼 극중 역할에 익숙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단원들은 “준례 형님은 반드시 ‘졸병’이라고 불러야 대답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장 씨는 “우리 팀은 한 가족이다. 한 가족은 서로 간 경계를 두는 것이 아니다”며 기쁘게 소감을 밝혔다.

인생 2막을 열다
극 중 ‘개구리’ 역을 맡은 임영월 씨는 지난 2008년 방광경화란 진단을 받았다. 그전까지 정확한 병명을 몰라서 심장과 자궁 등 세 차례나 수술을 했고, 30년 동안 운영해온 미용실 문도 닫았다. 다행히 몸은 조금씩 회복됐지만 우울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임 씨는 우연히 복지관에서 동화구연을 한다는 소릴 듣고 동화구연을 배우기 시작,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동화구연가가 됐다. 그리고 최근 연극팀 ‘뜨는 해’를 통해 배우가 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임 씨는 “연극을 하면서 배가 2인치나 줄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단원들이 모두 건강해지고 있다”면서 “이젠 연기와 동화구연을 가장 잘하는 할머니란 소릴 듣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연기를 시작하며 성격이 바뀐 단원도 있다. 레이스 치마에 분홍색 가발을 눌러쓴 ‘요정’ 역의 이명옥 씨가 그 주인공이다. 단원들은 이 씨가 연극을 시작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활달해졌다는 반응이다. 임영월 씨는 “항시 의기소침하고 조용조용하던 막내가 발성 연습을 하면서 목소리도 많이 커지고, 성격이 활달해졌다”면서 “그만큼 연습도 열심이어서 단원 모두가 칭찬 한다”고 덧붙였다. 이 씨 역시 “녹화방송이 아니라 즉흥으로 연기를 선보여야 하니까 점점 순발력이 늘고 있다”고 공감했다. 이명옥 씨는 무대연출가 최현수(59) 씨와 함께 어린이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래세대 환경교육가로 일하기 위해 지난해 9월부터 교육을 받고, 올해 4월부터 유치원 등을 돌며 환경교육을 펼치고 있다. 그는 “새로운 마음이 인생을 채우며, 나이를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며 환히 웃었다.
한편 쓰레기 ‘대장’ 역의 최은희 씨는 정식 배우로서의 데뷔를 노리고 있다. 제1의 인생이 가족을 위한 봉사였다면, 이제는 자신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집에서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집밖에는 우리가 즐겨야할 것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최 씨는 지난 5월 경남 거창연극학교 장미극장에서 열린 제2회 거창실버연극제에서 연기상을 타기도 했다. “삶이 연극이잖아요. 곧 연극 속에 삶이 있으니까, 상황에 맞게 제 자신을 발전시켜 가고 싶어요.”
이렇듯 연극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자신들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멀티 플레이어를 꿈꾸다

젊은이들보다 더한 열정으로 무대를 장악한 할머니 배우들.

 
연극팀은 요즘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지난 5월 경남 거창연극학교 장미극장에서 열린 제2회 거창실버연극제에서 단체부문에서 은상을 거머쥔 이후, 어린이집과 단체기관 등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공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과 4개월 만에 얻은 쾌거다.
이경옥 사회복지사는 “단발성 행사로 그칠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의 호응을 얻고 있다”면서 “6월 오정아트홀(370석)에서 공연을 시작으로 7월 내내 공연 일정이 잡혀 있다”고 전했다.
연극팀 단원들은 “스케줄이 계속 생겨서 즐거운 반면, 책임이 막중해졌다”며 행복한 고민을 털어놨다.
단원들은 앞으로도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통해 노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목표다. 단순한 연극팀을 넘어 환경사랑을 전하는 환경교육가로, 아동들에 동심을 일깨우는 동화구연가로 문화 전령사이자 환경지킴이로 나선다는 것.
노년들에게 여전히 문화는 멀다. 당연히 문화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제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어떠한가. 감히 멀티 플레이어란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다.
젊은이들보다 더한 열정으로 무대를 장악한 할머니 배우들의 종횡무진 활약을 기대해본다.
끝으로 연극팀 ‘뜨는 해’ 배우들의 희망 전언이다.
“동창생 한 명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돈도 많은 부자인데다 자식들도 장성했지만 목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것은 곧 우울을 불러왔고, 그는 인생에 아무런 재미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연극을 권하고 싶다(이명옥 씨).”
“손자들한테 인정을 받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기분은 최고다. 그들은 나의 열렬한 팬이다(임영월 씨).”
“적적할 틈이 없다. 아들들과 딸이 있지만, 나는 같이 살지 않을뿐더러 그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극을 하고, 주어진 역에 충실하기 위해 생각할 시간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노인을 두고 ‘뒷방’ 신세라 하던 것은 다 옛말이다.(장준례 씨)” 

배샛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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