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경찰들이 양손에 악기를 들었다. 경찰 시절부터 다듬어온 연주 실력으로 전국 곳곳을 누비며 활약하고 있는 이들, 민중의 지팡이에서 민중의 악사로 변신에 성공한 ‘무궁화악단’이 그 주인공이다.

‘인생 2악장’ 연주 중
한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 이런 무더위 속에서도 공연 연습을 한다는 악단을 만나러 지난 6월 30일 오후 서울 성동구 명문예식장을 찾았다. 악기 소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연습실 문을 열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30여 명의 단원들이 진지한 눈빛으로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 퇴직 경찰 모임인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소속 오케스트라 ‘무궁화악단’이다.
단원들의 손은 악기를 연주하고 발은 리듬을 맞추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한곡씩 연주가 끝날 때마다 지휘자가 감상평을 하고, 단원들은 이에 맞춰 악기를 재정비했다.
다시 “원 투, 원 투”라며 지휘자가 합주의 시작을 알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악보에 두고, 악기를 손에 들었다. 드럼을 치는 김갑진 씨의 손놀림이 분주해지며 열정적인 합주가 이어졌다. 한여름 무더위건만 지하연습실은 시원한 청량감이 넘치는 듯했다.
무궁화 악단의 ‘막내’는 65세, 전체 50여 명 단원들의 평균 연령은 70세에 달한다. 경찰악대에서 활동하던 퇴직경찰들을 비롯 군악대, 밤무대 등에서 화려한 이력을 쌓은 베테랑 연주가들이 모인 악단은 올해로 창단 20주년을 맞았다. 이미 정년퇴직을 한 이들이지만 악단에선 정년퇴직이란 있을 수 없다.
“노년에 봉사도 하면서 음악도 하고 보람 있게 제2의 인생을 살아가자, 이런 뜻에서 조직돼 활동하고 있습니다.”
무궁화 악단은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소속의 악단이되, 경우회 행사는 물론 전국 각지로부터 초청 받고 있다.
처음에는 불러주는 곳이 없어 주로 거리음악회를 열었다. 평일에는 지하철역이나 시장에서, 주말에는 등산로 입구에서 간이연주회를 가졌다. 현재는 전국 곳곳을 누비게 됐다.
지리산에 올라가 빨치산전투 희생 경찰들의 넋을 위로하는 공연도 했고, 강원도의 경찰 체육대회와 부산의 경찰장학금 행사에 초청된 적도 있다. 또 전남 강진과 강원 홍천에서 군민을 위한 공연도 했고, 학교장들로부터 행사에 초청을 받아 어린 학생들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다른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거나 대학 합창단과 어울려 합동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최근에는 천안함 궐기대회 행사에 메인 악대로 초청 받을 만큼 높은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나이를 초월한 음악 열정
악단은 매주 수요일 오후 3시에 모여 2시간 동안 합주를 펼친다. 드럼, 트럼펫, 색소폰, 북 등의 악기로 구성된 악단은 공식 공연 외에도 여러 행사에서 수반되는 행사음악까지 소화해낸다.
레퍼토리도 무궁무진하다. 가요와 팝, 록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편곡하는 김효근 씨가 만들어 놓은 레퍼토리도 꽤 많다. 그 중 장소와 분위기에 맞는 곡을 적절하게 골라 연주한다.
“우리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주합니다. 세 살 먹은 아이들의 노래서부터 여든 살 노인들의 노래까지, 그리고 30~40년대 곡에서부터 최신 유행가까지 거의 모든 곡을 소화합니다. 그래서 행사를 갈 때면 장소와 청중에 맞게 연주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서울 성덕교회에서 ‘할머니 여름학교’ 행사를 통해 500명이 넘는 청중 앞에서 합주를 선보였다. 단원들은 “당시 할머니들이 우리 연주를 듣고 나서 마치 천국에 온 거 같다고 하더라”면서 “봉사 받을 나이에 봉사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들 실버악단 역시 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노령인 이들의 음악활동에는 건강이 가장 큰 문제다.

 단원 이동호(80)씨는 성북구청에서 마련한 공연에서 연주를 하던 도중 쓰러졌다.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이 씨를 제외한 단원 모두가 걱정에 숨죽이던 날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쓰러졌던 이 씨가 계속해서 연습실에 나와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 단원들은 “이 씨의 건강을 생각해서 말려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면서 “그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음악에 몰두하는 단원이 비단 이 씨 뿐만은 아니다. 창단멤버이자 단원 김덕형(78)씨는 경기도 양평에서 이곳 연습실까지 찾아오는 성실파다. 기자가 취재를 위해 찾은 날에도 다른 단원들의 무거운 악기를 척척 날라다 주며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
단원 이준익 씨는 악단에서 가장 많은 악기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날에는 공영방송에 출연하며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의 격려가 컸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도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음향기기 사업을 하는 이 씨는 기꺼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악단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계급장 떼고 연주 실력 갖춰
악단은 현재 경찰악대로부터 지원받은 악기 25종을 보유하고 있다. 행사시마다 챙겨 입는 유니폼도 있다. 바로 경찰복과 경찰모자다. 권인기 대한민국재향경우회(1技能會) 회장은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사람들인지라, 악기를 연주할 때도 그 마음가짐을 갖추려고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복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임할 때 경찰 시절의 품위와 마음가짐이 다시금 생긴다는 것이다.
목표를 공유하고 공동체 의식을 갖는 일은 그 조직의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경찰은 계급조직의 문화를 일정 부분 끌어가게 된다. 하지만 무궁화악단에서는 계급장은 없고 음악만 있을 뿐이다. 어떠한 조건에서든 단원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한다는 것이 이유다.
“직장에서의 계급이 어쨌든 여기에서는 무조건 연주 실력으로 인정받습니다. 실력에 따라서 보는 시선도 달라지죠.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면 그걸 더 존중합니다.”

상·하, 계급, 신분 등을 떠나서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하도록 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악단의 의식은 미래의 후배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과거 업무관계로 묶인 딱딱한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를 떠나 선·후배라는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찰악대에 있는 후배들과 악보를 교환하고 복장을 인수하다보면 어느새 수직적이던 조직문화는 사라지고 없지요.”
악단은 후배 양성을 위해 구청 등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후 성장을 하고, 다시 후배양성을 위한 순환적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는 바람에서다.
“우리는 미래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하고 싶은 음악활동을 충분히 하면서, 민중의 악사로 세상에 좋은 소릴 퍼뜨리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연주 초청 쇄도… 팀 나눠 활동
권 회장은 경찰 시절 음악을 만나 노년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십년간 경찰 악대에서 꾸준히 악기를 연주해온 만큼 실력도 수준급인 그는 현재 무궁화악단과 분당오케스트라에서 동시 활약하고 있다. 다른 단원들 역시 대외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경찰 시절 공직자 본연의 임무뿐 아니라 음악을 통해 취미 생활과 여가시간 활용을 꾸준히 해온 덕분이다.
“우리 단원들은 경찰직을 하면서도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단원 개개인이 대외적으로 연주활동을 펼칠 만큼 실력이 출중하지요.”
이들의 수준 높은 실력을 반영하듯 다달이 연주회 일정도 점점 빡빡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악단은 단원들을 3~4개 팀으로 나누어 연주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악단은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악기를 다루며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각오다. 비록 은퇴한 경찰이지만 사회에 공헌하는 민중의 지팡이로 영원히 남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도 있다. 음악에는 정년이 없는 만큼 모든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위해 이들의 꾸준한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배샛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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