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高)물가 시대다. 음식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그런데 거꾸로 가격파괴를 선언한 식당들이 있다. 불황 시대에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에게 축복이나 다름없는 셈.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사는, 우리네 미덕을 십분 살린 저가 식당들을 찾아 나섰다.

노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서울 종로 일대에는 갈 곳 없는 70,80대 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주머니 걱정 없이 밥과 술을 느긋하게 먹을 수 있는 먹자골목이 있다.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간 값싸게 끼니를 해결해온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어르신들께 따뜻한 밥 한 그릇
지난달 2일 오후 5시께 종로 낙원상가의 ‘소문난 집 추어탕’은 이른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몰려온 손님들로 북적인다. 식당을 찾은 사람들은 저마다 콧방울에 땀을 상글상글 매단 채 푸짐한 우거지 해장국을 한 그릇씩 비워내고 있다. 통나무를 썰어 만든 투박한 테이블에는 세월의 때가 묻어있다. 가게 벽면에는 이곳의 역사와 명성을 담은 신문 기사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70~80년대 시절에나 볼법한 허름한 식당이지만, 이곳은 단 하나의 메뉴로 30년 넘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집이다.
꼭두새벽마다 서울 마장동 축산시장과 가락 농산물시장에서 소 뼈·내장, 우거지를 사들여 푹 고아 국물을 낸 우거지 해장국 ‘우거지 얼큰탕’이 단돈 1500원이다. 식당은 낮은 가격을 ‘다다익선’으로 맞추기 위해 새벽 4시에 문을 열어 손님들을 맞이한다.
식당 주인 권영희(64)씨는 “이 주변 식당들이 모두 밥값을 저렴하게 내놓고 있기 때문에 값을 더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다”며 넉넉한 미소를 짓는다. 식당이 문을 연 지는 올해로 벌써 56년째. 권 씨가 시집을 오면서 맡게 된 식당은 30년이 넘도록 똑같은 가격으로 단골들의 입맛을 맞춰주고 있다.
정릉에서 온 김무득(85·가명)씨는 이곳의 15년 단골이다. 국물에 들어있는 푸짐한 건더기만 봐도 기분이 든든해진다는 그.
“값도 저렴하지만 이 집 국물 맛을 정말 끝내줍니다. 얼마 전에 친구를 대접한다고 다른 식당에서 비싸게 주고 밥을 먹었지만, 여기만 못하더라고. 제 값도 못하는 음식보다 저렴하면서 맛있는 이곳 음식이 제일 좋습니다.”
식당은 택시기사들에게도 꽤 인기다. 70대 택시기사 김수철(가명) 씨는 매일같이 이곳에서 한 끼를 때운다. 그는 이날도 가벼운 마음으로 든든하게 한 끼를 때웠다.
“40대 시절부터 다니기 시작했으니, 식당을 이용한지는 30년이 훌쩍 넘었어요. 택시 운전을 하는 동료들과 자주 찾습니다. 종로 사대문 안은 밥 먹을 데가 없어요. 가격이 싸도 맛없으면 밥을 못 먹거든. 이곳은 먹을 만하니까 오는 거지. 양은 딱 맞아요. 다른 사람들은 맛있는지, 자주 더 먹더라고.”
이곳의 우거지 해장국은 저렴한 가격에 한 끼 식사뿐 아니라, 술안주로도 그만이다. 식당은 손님들의 과음을 방지(?)하고자 소주 반 병치를 따로 팔고 있다.
인천에서 온 이동수(57·가명) 씨와 그 직장 동료들은 이날 저녁식사를 하며 반주를 곁들였다. 신이 난 말투로 이곳 자랑을 늘여놓는 이 씨.
“4명이 술까지 먹었는데 돈 만 원도 안 나왔어요. 저는 처음 오는데, (동료를 가리키며)저 친구는 15년 전에 와서 6000원을 쓰고 갔대요. 그 소릴 듣고 깜짝 놀라서 인천서 이곳까지 다들 온 거 아닙니까(웃음).”
식당은 옛 맛을 잊지 못해 다시금 찾아온 이들에게 ‘부담 없는 가격’으로 ‘변함없는 맛’을 선사하고 있다. 경기불황과 물가상승 등 많은 변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질이나 가격이 변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식당 주인 권영희 씨는 그 이유를 “봉사 아닌 나눔”이라고 말한다.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니까 봉사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저는 자식들이 잘되라는 마음으로 나눈다고 생각합니다. 어르신들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죠.”
권 씨는 앞으로 식당을 계속 이어갈지는 미지수라고 밝혔다.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영업 정지’를 생각한 지도 벌써 십년 째. 그만큼 오랜 세월동안 정이 든 식당 문을 닫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식들이 모두 ‘엄마 고생하니까 그만 둬’라고 권하기는 하는데요. 집이 좀 허름해서 그렇지, 어르신들이 저렴하게 식사하고 가시는 모습도 보기 좋고, 손님들이 학생 때 와서 시집장가 간 후에 그 자식들이랑 함께 올 때면 뿌듯하기도 하고. 아직까진 모르겠어요.”
손님의 대부분이 단골인 이곳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르는 단골부터 주인을 위해 음료수를 챙겨다 주는 손님까지 다양하다. 모두 국밥 한 그릇으로 빚어낸 인연이다.

먹자골목엔 추억이 있다
3·1운동 등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탑골공원 뒤편에는 밥 한 그릇에 배부른 사랑을 담아내는 저가 식당들이 즐비하다.
음식종류도 닭발·돼지껍질·북어찜·두부김치·생선구이·오징어볶음·순두부술국·순대술국·모듬전·해물탕·생선매운탕·닭도리탕·감자탕 등 없는 것이 없다.
수십 년째 2000원~3000원 대의 싼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골목 식당들은 노인과 학생 등 비교적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풍년집’, ‘선비옥’, ‘초원식당’ 등 주인은 다르지만 가격은 어느 집이나 똑같이 싸다.
단골과 주인이 수확의 기쁨으로 물들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 붙여진 ‘풍년집’. 지난달 13일 오후 6시께 이곳 야외 테이블에는 막걸리를 마시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손님들은 가게에 들어서면 의자를 하나씩 집어 들고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낯선 사람과도 아무렇지 않게 함께 식사를 한다. 막걸리 한 병을 시켜 놓고 구성진 옛 노래 장단에 맞춰 몸을 들썩이기도 한다. 단골인 듯한 손님은 이따금 주인에게 농을 걸기도 한다.
청량리에서 온 이만득(69·가명) 씨는 “이곳은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추억이 깃든 곳이라서 일부러 찾는다”고 말했다. 재래시장처럼 북적대는 골목에서 손님들은 술잔을 돌리며 지나온 날을 추억한다.
‘풍년집’은 20년 전 가격을 그대로 받고 있다. 꽁치가 1000원, 제일 비싼 안주라 해봐야 고작 5000원이다. 가격이 저렴한 대신 종업원은 쓰지 않고 주인이 직접 서빙을 한다.
“손님들이 몰려오면 치우고, 차리고, 치우고, 차리는 일의 반복이라서 힘들 때도 있지만, 단골들이 있어서 현상 유지는 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노인들을 상대하다보니 저렴할 수밖에 없다는 주인의 설명이다. 식당의 금전시계는 노인들의 쌈짓돈에 멈춰있다.

정과 의리로 영업
‘풍년집’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몇 발자국만 이동하면 좁은 ‘선비옥’이 나온다. 이곳은 테이블이 모두 8개로, 끼니때면 줄을 서서 먹어야 할 만큼 빼곡히 들어찬다. 손님들 대부분은 60,70대 노인이지만 간혹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이 곳 주인 배종수(49)씨는 “손님 대부분이 노인들이긴 한데, 30~40대 회사원들이나 근처 학원 다니는 학원생들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
냉면 한 그릇에 3000원을 받는 식당은 단골장사로 유지된다. 손님들의 인기 식사메뉴인 닭계장과 육개장은 각각 2000원, 3000원이다. 식당은 가격이 파격적인 대신 치열한 원가 절감 노력에 들어갔다. 그리고 단골손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정과 의리를 살렸다.
“여기는 500원만 올려도 단골들이 난리가 날 거예요.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아무리 재료값이 많이 올라도 음식 값을 올릴 순 없죠. 대신 직접 시장을 찾아가 도매 거래를 하면서 재료비를 절약하고 있어요.”
올해로 개업 16년째를 맞이한 ‘선비옥’은 단골손님 때문에 ‘비좁은’ 식당 특성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배 씨는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려니 단골손님들이 눈에 밟힌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벽 일찍부터 식당 문을 열어 저녁 늦게까지 운영한 지 16년 째. 배 씨의 손에 촘촘히 자리한 굳은살이 지난한 세월을 대변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장사를 관둘 생각은 없다.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거나,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정을 나누며 사람과 만나는 식당 일이 좋은 것.
“장사는 앞으로도 계속 할 거예요. 하다가 안 하면 아프거든. 우린 일 안 하면 정말 힘들어요(웃음).”

사람 사는 맛 풀풀~
어스름한 새벽부터 밥집을 찾는 택시기사, 말벗이 그리운 노인, 호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 한 끼가 아쉬운 여행객 모두가 부담 없이 찾아가는 먹자골목.
이곳에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 온 ‘우리’ 아버지들이 있고, 60년대 5일장에서 보았던 정이 철철 흐르던 풍경이 있다.
고물가에 사람들의 아우성이 갈수록 커지는 세태. 그래도 이곳에는 사람 사는 맛이 넘치고 있다. 

공동취재/배샛별 기자

김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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