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으로 억압받는 여성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내는 영화제가 열렸다. 그들의 출발을 격려하고 여성들의 폭력과 인권의 문제를 영화와 함께 풀어가는 뜻 깊은 현장 속으로 찾아갔다.

희망을 초대하다
여성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의 생존과 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여성인권영화제가 지난 10월 6일부터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씨네코드 선재에서 개최됐다.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번 영화제에서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일상과 투쟁의 나날들’, ‘그대 마음과 만나, 피움’이라는 세 가지 섹션을 주제로 총 13개국, 35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에서는 국내외의 다양한 여성폭력의 현실과 사회적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총 10편의 작품이 소개됐다.
두 번째 섹션인 ‘일상과 투쟁의 나날들’에선 척박한 여성인권의 현장에서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세 편의 장편과 한 편의 중편이 마련됐다. 지난 제3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우리가 카메라를 든 이유’에 출연했던 김미례 감독이 ‘외박’을 선보였고, ‘버라이어티생존토크쇼’, ‘페르세폴리스’, 아프리카의 여성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프리카의 세 여자’ 등이 상영됐다.
세 번째 섹션 ‘그대 마음과 만나, 피움’에는 연대와 소통을 통해 치유하고 성장하는 여성들을 담은 세 편의 장편이 준비됐다. 세 여성의 좌충우돌 농촌 생활기를 담은 ‘땅의 여자’, 한국사회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핀란드의 지적 장애 소녀의 독립 성장기를 담은 ‘날 좀 존중해줘’, 사실상 법률과 치안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인도 구자라트 지역에서 스스로를 위한 법정을 여는 여성들을 담은 ‘정의를 찾아서’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영화제 개막식은 지난달 6일 씨네코드 선재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장에서 한국여성의전화 정춘숙 상임대표는 “올해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아동 성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난 해였다”면서 “여성인권영화제는 여성 폭력의 현실을 알리고 폭력 근절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을 모색해왔다”고 밝혔다.
강은숙 공동대표는 “이번 영화제는 특별히 여성의 몸과 연애,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초점을 맞춰 준비했다”고 전했다.
이어서 정춘숙, 강은숙, 이덕자 공동대표가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함께 하겠습니다”고 외치며 개막을 선언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최영희 의원은 인사말에서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여성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면서 “계속 힘을 보태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UN 인권정책센터 신혜수 상임대표는 “여성영화제가 개최되는 것은 우리 사회 여성인권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면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도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상임대표는 “여성인권영화제가 우리 사회의 여성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영화제를 함께 키워나가자”고 축사를 전했다.
계속해서 개막작인 ‘올리비아 클라우스(Olivia Klaus)’ 감독의 ‘침묵을 말하라(Sin by Silence)’가 상영됐다. 영화는 가정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저지른 살인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과 뜨거운 외침을 다뤄 관객들에게 여운을 남겼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참여한 란희 인권정책 국장은 “침묵을 말하라는 폭력에 맞서 여성 재소자 모임을 결성한 여성들이 침묵하고 있던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나누며 전진하고 성취하는 내용이다”면서 “관객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울분이 퍼져나가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한편 개막식을 찾은 송하나(23)씨는 “평소 축제나 행사에 관심이 많아 영화제에 왔다”면서 “여성 폭력을 남의 일이라 생각해 공감하지 못했는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심정과 상황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울컥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톡톡 튀는 영화제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는 뜨거운 여성 이슈를 심층적으로 다루기 위해 ‘피움 줌 인’, ‘피움 줌 아웃’을 신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주제로 한 피움 줌 인은 낙태에 관한 문제와 이를 풀어가는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다.
피움 줌 아웃 ‘연애의 이해와 실제’에서는 총 8편의 작품을 통해 단순히 상대와 나의 관계,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연애가 다른 사람들의 연애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비교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애의 상처와 이별 후의 허무를 담아낸 ‘플라스틱’, ‘솔로 36분’,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은 관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았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도 마련됐다. ‘감독과의 대화’와 ‘피움 톡톡’이라는 소통의 장을 통해 감독과 관객들은 영화를 본 소감을 함께 나눴다.
해마다 출품공모전을 진행한 여성인권영화제는 여성의 삶을 다양한 시각으로 조망한 네 편의 작품 ‘꽃님이’, ‘놈에게 복수하는 법’, ‘요쿠르트 아줌마’, ‘파마’를 선정해 상영했다. 특히 올해는 ‘피움 관객상’을 신설해 영화제 기간 여성인권을 꽃 피운 영화를 시상했다. 공모 당선 작품은 빈곤여성, 성폭력 피해 여성, 이혼 여성, 이주 여성에 포커스를 맞춰 그들의 일생과 투쟁의 나날을 관객들에게 전했다.
한편 영화제가 열린 상영관에선 관객들을 위한 풍성한 부대행사도 마련됐다. 피해 받은 여성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추모연못’과 ‘멈춘 그녀의 신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강인함을 표현한 ‘가정폭력생존자 미술치유 그림전시’, 여성인권에 무지한 발언들을 모은 ‘그 입 다물라’ 등의 행사는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피움족이 야심차게 준비한 ‘나는 폭력에 반대합니다’ 서명 캠페인은 많은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영화제 관계자는 “개막작이었던 ‘침묵을 말하라’와 부대행사로 마련한 ‘멈춘 그녀의 신발’은 실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면서 “구체적으로 여성폭력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한 준비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또 “성희롱 발언을 모은 ‘그 입 다물라’에도 상당히 많은 관객이 투표했다”고 밝혔다.
영화제를 찾은 대학생 김소연(22)씨는 “피해자 여성의 구두를 진열해 놓은 ‘멈춘 그녀의 신발’이 인상적이었다”면서 “처음에는 문구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아 구두가 단순히 여성성을 강조하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고 다시 구두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희망을 꽃피우는 문화
연두색 풍선을 활짝 피우며 시작을 알렸던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는 여성 힙합퍼의 이야기를 담은 폐막작 ‘세이 마이 네임’을 끝으로 폐막했다. 영화는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힙합과 R&B의 세계에서 여성뮤지션들의 계급, 인종, 성별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것은 우리들 내면의 외침이다’라고 분출하는 작품은 여성 래퍼들의 랩 속에 깃든 여성으로서의 슬픔과 분노, 환희를 힘차게 그려내 관객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지난달 9일 진행된 폐막식에서 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사무처장은 “영화제 기간 동안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면서 “우리 사회의 전 지구적인 폭력에 반대하고, 그 폭력을 넘어서 평화의 바다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여성인권영화제는 행동이고 연대의 마음이며 여러분 자신이다”고 전했다.
한편 친구와 함께 폐막식을 찾은 이금향(28)씨는 “영화가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 흥미로웠고 소외받는 여자들이 힙합을 하는 모습이 신선했다”고 말했다.
집이 가까워 영화제에 참석하게 됐다는 정희채(30)씨는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다”면서 “정치적으로 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여성의 권리가 소중하다고 언급 하는데 그치고 있어 아쉬웠다”고 말했다. 또 “이러한 시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걸음이 된다고 여긴다”고 덧붙였다. 

김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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