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이웃 _ 김명희 낭독봉사자

독서의 계절, 가을. 눈으로 보는 책이 아닌 귀로 듣는 책을 만드는 곳이 있다. 바로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이다. 이곳에서 자신만을 위한 독서가 아닌 남을 위해 책을 읽는 이를 만났다. 9년째 한결같은 목소리와 마음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도서를 제작하고 있는 김명희 낭독 봉사자다.

낭독 봉사, ‘전달력’이 생명
“어디서든 꽃을 피운다는 마음을 잃지 마세요. 자신의 처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긋나긋하지만 전달력 강한 목소리가 작은 부스 안을 가득 채웠다.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 녹음실에서 만난 김명희 봉사자는 와타나베 가즈코의 ‘당신이 선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를 녹음 중이었다. 잠시 뒤 녹음 내용을 확인한 그는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같은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음성도서의 경우, 시각장애인들이 소리로 들으며 책 내용을 파악하기 때문에 정확하고 전달력 있는 목소리로 읽는 것이 중요해요. 목소리 톤부터 발음, 억양, 호흡까지 세심히 확인해야하죠.”
한 권의 책을 녹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책마다 천차만별이지만, 평균적으로 한 권당 2~3달이 걸린다. 꾸준히 성실하게 활동 하는 것 역시 낭독 봉사에서 중요한 요소다. 김 봉사자는 어느 덧 9년째 낭독 봉사를 하고 있다.
그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도서 낭독 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부터다. 음성도서 모니터링을 하던 지인을 통해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김명희 봉사자는 이후 9년째 매주 두 시간씩 꾸준히 활동 중이다. 김 봉사자가 처음 낭독 봉사를 시작할 때는 테이프로 음성도서를 제작했다. 그 후 CD를 거쳐 현재는 전자 음성파일로 발전했다.

듣는 책…‘소리와 활자’ 전달 방식 차이 뿐
음성도서 제작을 위한 낭독 봉사는 작은 녹음 부스 안에서 진행된다. 부스 안에는 녹음을 위한 컴퓨터 한 대와 마이크, 헤드폰뿐이다. 컴퓨터에는 녹음을 위한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다. 봉사자는 책을 낭독해 녹음하며, 녹음 상태를 확인하고, 재녹음이 필요할 경우 스스로 편집하며 다시 녹음한다. 봉사자가 대부분의 활동을 홀로 하는 셈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녹음을 진행하는 것이 활동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녹음한 도서를 듣는 시각장애인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다른 봉사자들과의 교류도 적은 편이다. 그럼에도 김명희 봉사자는 봉사하는 매순간마다 보람과 배움을 느낀다.
김 봉사자는 “한 권의 책을 단순히 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책을 낭독하며 스스로도 많은 배움을 얻고, 내 목소리로 한 권의 책을 전달해 줄 수 있어 보람이 크다”고 전했다.
이전에는 ‘책의 내용 전달’만을 목적으로 음성도서를 제작했다. 따라서 책의 본문만 녹음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책의 표지나 책날개, 저자 소개까지 책에 적힌 글자를 빠짐없이 읽어 시각장애인에게 한 권의 책 자체를 전해준다.
그는 “음성도서를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음성과 활자라는 전달 방식의 차이일 뿐 시각장애인 역시 우리가 책을 읽는 것과 다름없이 책을 듣는다고 생각하며 녹음한다”고 밝혔다.
비록 책을 듣는 시각장애인과 직접적인 만나는 것은 어렵지만, 복지관을 통해 자신의 책을 듣는 이들의 소식을 듣기도 한다. 그 중 김명희 봉사자에게 감동을 준 이가 있다.
“한때 종교 서적에 대한 의뢰 요청이 크게 늘었어요. 알고 보니 중도 실명된 목사님께서 신청하셨더라고요. 아직 점자를 익히지 못해서 점자도서를 읽을 수 없어 음성도서를 신청하셨어요. ‘이 많은 책을 전부 들으실까’하는 의문도 들었는데, 목사님께서 제가 녹음한 책을 듣고 통째로 외우셔서 설교를 하셨대요.”
흔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로 점자도서를 많이 떠올린다. 음성도서의 경우, 점자를 익히지 못한 시각장애인을 위해 제작된다. 모든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중도 실명돼 아직 점자를 습득하지 못한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이용한다.

목소리로 행복 나누는 낭독 봉사
9년째 낭독 봉사 활동 중인 김명희 봉사자는 그간 수많은 책을 낭독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책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삼국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삼국지는 분량도 길고, 등장인물이 많아서 어려웠어요. 특히, 적장을 유혹하는 장면의 대사를 낭독할 때 어색함에 같은 대사를 수 십 번 읽었어요.”
그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낭독할 때는 더욱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 인물의 특징을 살려 읽어야 듣는 이들이 책의 느낌을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봉사자는 “낭독 봉사는 단순히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통째로 전달해 준다는 생각으로 해야한다”며 “낭독 봉사를 시작한지 9년째지만 지금도 발성이나 발음에 대한 책을 보고 공부하거나 아나운서의 발음을 유심히 관찰하고 따라해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드라마나 각종 미디어 매체를 통해 ‘음성도서 낭독 봉사’가 소개되며 낭독 봉사를 지원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김명희 봉사자가 활동 중인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 역시 낭독 봉사 대기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모든 봉사 신청자가 낭독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발음, 억양 테스트를 거쳐 통과가 되어야 낭독 봉사를 시작 할 수 있다.
그는 낭독 봉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신문이나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귀띔했다.
김명희 봉사자는 마지막까지 낭독 봉사 활동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낭독 봉사는 스스로 행복과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활동입니다. 음성도서 제작에 대한 관심이 단기적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분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글·사진/정지영 기자

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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