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이웃 _ 왕태윤 스파인2000 대표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는 꿈이 있다. 그 꿈은 대개 낮고 후미진 곳에 감춰져 있으며 누군가 그 안을 들여다보고 반응해주지 않으면 사라진다. 제 안의 것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나름의 빛을 뿜으며 누군가를 밝혀주었을지도 모를 꿈이었다. 왕태윤(사)스파인2000대표는 세상이 미처 보지 못하는 작은 꿈들을 찾는다. 차별과 소외, 기회부족으로 소중한 꿈이 힘 없이 사그라지는 일이 없도록. 더 어리고 약한 이들의 꿈을 지켜주는 것이 왕태윤 대표의 꿈이다. 

사람 마음속엔 봉사심 있다
왕태윤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이 훗날 사람들을 돕고 지원하는 일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성격이 활발했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던 보통의 학생이었다. 군 제대 후 1992년 불의의 사고를 겪으면서 삶의 수레바퀴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 때문에 좌절하면서 삶을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2000년까지 누워서 생활했던 그는 국립재활원에 입원하고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왕 대표의 삶은 전환기를 맞았다. 김동민 사회복지사의 지원으로 척추장애인들과 함께 동호회를 결성하게 된 것이 스파인2000의 시작이다. ‘사교적이고 사람들 끌어 모으는 재주’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스파인(spine)은 척추·등뼈, 작은 바늘 등을 이르는 말이다. 바늘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스파인2000은 바늘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 되자는 뜻을 담고 있다.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회원 수가 2014년 10월 현재 2584명이 되었고, 그 중 분야별로 핵심적으로 활동하는 인력들은 100여명 정도다. 정치인, 연예인, 의료계 종사자 등 다방면의 봉사인력들이 포진돼 있어 각자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왕태윤 대표는 “사람의 내면에는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다 있다. 좋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은 같다. 마음을 열면 좋은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스파인2000은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올해 4월 사단법인으로 승인을 받았다. 민간단체 모임으로 활동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제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사람들을 모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장애 정도가 심한 사람이 나서서 하니까 더 많은 도움을 준거죠.”
왕 대표는 우연히 티브이에서 우리나라 장애아동 8명을 입양해 키우는 미국인 부부의 소식을 접했다. 아이들이 외국에 나가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창피했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장애 아동부터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장애인 복지시설의 원장으로부터 아동들이 시설에서 살면서 의사를 만나본 적도,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본 적도 없다는 말을 듣고 2002년부터 현재까지 장애아동 독감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다. 이밖에 먹을거리 문화지원 등 장애아동의 생활전반에 대한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 달 4일부터 한 달 간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소속 의료진 8명의 자원봉사를 통해 300명의 장애아동, 이주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독감예방접종을 실시했다.
장애아동 돕기를 하며 알게 된 (故)서명희 의사는 특별한 인연으로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추천으로 알게 된 서 의사는 기독교여의사회 소속으로 3~4년 간 주말마다 의료봉사를 지속했고, 스파인2000에서도 의료지원활동을 했다. 서 의사는 왕 대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장애아동들을 위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장애아동 지원 시작을 계기로 사회의 지원과 보호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간절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의 영역을 넓혔다. 이주노동자, 지역아동센터, 쪽방촌 거주민, 저소득 어르신, 탈북청소년까지 대상 범위가 확대됐다.

누구라도 교육·의료적 지원 받을 권리 있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면서도 이념적인 차이와 외국인에 대한 차별 인식 때문에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왕 대표에 따르면 이주 노동자들은 3D 업종에 종사하며 주 6일 하루 열 네 시간 노동하면서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처지다. 팔이 잘린 한 외국인 노동자가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기도 했다. 왕 대표는 “우리도 어려운 시기에 독일과 미국에서 차별받으며 일했다. 이주노동자와 탈북 청소년들이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이상 교육과 의료 등 최소한의 권리 보장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성폭력특별법 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면서 한 십대 소녀로부터 ‘저희 같은 여자 아이들의 편이 돼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스파인2000 활동 이후 가장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어른들의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들은 왕 대표의 주요 관심대상이며 탈 성매매 여성에 대한 부분도 놓지 않고 있다. 가정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길거리를 배회하는 가출 청소년 아이들에게 잠 잘 곳과 따뜻한 아침식사를 제공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왕 대표는 좋은 직업과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더라면, 남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스파인2000 창단 이후 지난 15년 사이 패혈증, 골수염, 신장암을 겪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삶의 어려움과 고통을 알기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9월 스파인2000은 동대문 쪽방촌으로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와 동행한 적이 있다. 좁고 냄새나는 열악한 환경,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메트로 서울의 비참한 단면을 보았다.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왕 대표는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 권리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누구에게나 배움의 기회는 주어져야 하고 의료적인 혜택에서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꿈은 그래서 병원과 학교를 짓는 것이다. 누군가의 작고 소중한 꿈을 지켜주기 위해서.
“장애아동들은 외출도 쉽지 않아요. 저희가 직접 가서 독감예방주사를 맞게 해 줍니다. 15년 해 오면서 왜 이런 일을 우리가 해야 하나, 나라에서 해야 하는 것들인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뒤돌아보고 가지 않으면 언젠가 공멸하게 돼요. 함께 손잡아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글·사진/박선미 기자

박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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