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가 좋아 고수(전통음악을 연주할 때 북을 치는 사람)를 하던 청년은 우연히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들을수록 괴롭고 죄송한 그 이야기를 듣고 청년은 ‘그녀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1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오직 하나의 영화만을 생각한 고수 청년. 드디어 그의 영화가, 아니 소녀들의 영화가 완성됐다.

너무 끔찍해서 외면하고 싶은, 하지만 외면해선 안 되는
영화 ‘귀향(鬼鄕)’의 조정래 감독은 우리나라의 끔찍하고 서러운 이야기,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인 ‘위안부’ 소재를 다루고 있다.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꽃 같은 소녀들을 무자비로 납치 해 간 일본군. 그들은 아직도 눈을 가리고, 입을 막으며 피와 눈물로 얼룩진 그녀들을 외면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지만, 평생을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 “내가 살아있는 증거다”라며 온갖 고문과 학대 받아 생긴 자신의 몸을 내보이지만 일본은 ‘강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곳에 판소리꾼들이 공연을 나온다. 그 속에 있던 조 감독. 판소리가 좋아 전국을 다니며 북을 치던 그는 바로 그 날, 자신이 평생에 걸쳐 해야 할 일을 찾게 된다.
“2002년 판소리 공연을 위해 나눔의 집에 가게 됐고, 그 곳에서 듣게 된 이야기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요. 특히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은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너무 끔찍하고, 충격적이라서. 많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셔서 아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일본군을 거부하거나, 도망치거나, 성병에 걸린 소녀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잔인하고 끔찍한 실제 사실을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은 그렇게 조 감독의 인생으로 들어왔다.

제작 기간 13년, 길고도 짧은 기간
‘나눔의 집’에 다녀온 후, 조 감독은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악몽에 시달리던 조 감독은 비몽사몽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쓴 줄거리. 이후 조 감독은 줄거리를 바탕으로 여러 사람의 조언과 역사적 고증을 통해 고치고 또 고쳐서 ‘귀향’의 시나리오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고난은 그 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영화는 철저한 상업매체다. 관객 수에 따라, 흥행 여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위안부. 많은 사람들이 아는 순간 너무 끔찍해서 잊고 싶어 하는 소재. 너무 민감해서 함부로 다루면 큰일 나는 소재. 그야말로 ‘돈’이 안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투자자들은 관심이 없었다. “촬영 시작 후 일주일 만에 제작비 통장 잔고가 거의 바닥이 났어요. 그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죠” 조 감독은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돌파구가 생겨났다. 조 감독을 도와준 사람은 돈 많은 재력가도, 힘 있는 투자사도 아닌 바로 ‘국민들’이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국내외 약 4만여 명이 모금한 소중한 금액 6억원. 조 감독은 그 돈을 소중히 여기며 남은 제작을 마무리 지었다.
영화 ‘귀향’에는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민감한 소재지만 역사적 고증이 잘 이루어졌고, 시나리오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에 개봉했던 위안부 영화 ‘소리굽쇠’가 제작 2년 만에 개봉했지만 흥행에 참패한 이력이 있기에 모두들 조 감독을 걱정했다. 이러한 상황에 조 감독은 고민했지만 국민들이 보내준 고마운 후원금을 보고 ‘이 영화는 내가 반드시 만들어서 국민들께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영화는 결국 국민의 힘으로 만들게 됐습니다. 그 점에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소리굽쇠’는 의미 있고 수준 높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비상업영화라는 이유로 상영관 수가 적었기 때문에 영화가 개봉했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안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어서 못 봤던’ 것이다. SNS를 통한 활발한 홍보와 국민들의 관심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귀향’은 그와는 다른 행보를 걸을 수 있지 않을지 기대된다.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진 ‘귀향’
제작비는 충당이 됐지만 영화를 함께 제작한 스텝들이 필요했다. 후원금을 받긴 했지만 그마저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스텝들의 인건비를 챙겨줄 상황이 못 됐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조 감독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재능기부 혹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받고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스텝들한테 많이 고맙습니다. 적은 제작비로 인해 스케쥴이 빡빡하게 진행됐고, 그에 합당한 대우도 못 해준 것 같아서 미안해요. 이 영화의 숨은 공로자는 바로 스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좋은 영화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배우들 역시 노개런티로 출연하고, 자비로 촬영 준비를 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감수했다. “배우 손숙 선생님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흔쾌히 노개런티로 출연하고 싶다고 먼저 제의하셨고, 정인기 씨도 의미 있는 일에 함께 하고 싶다며 소속사와의 문제도 해결해주면서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셨어요. 일본어를 하는 배우들은 재일교포들인데 그들은 자비로 비행기를 타고 건너와 촬영을 하는 등 배우들의 의지와 희생이 컸죠.”
위안부 영화이니만큼 소녀 역할을 했던 여배우들의 고충도 상당했다. “위안부 소녀 역할을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오디션을 통해 뽑았는데, 촬영 기간 동안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정신과 상담을 받는 등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일본군 역할을 했던 분들도 마찬가지구요” 조 감독은 모두의 희생과 노력 끝에 영화가 만들어 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귀신으로라도 돌아오라
초경도 치르지 않은 소녀 수십만 명이 희생당했다. 타국에서 고통 속에 죽어간 소녀들은 귀신이 돼 구천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하는 그녀들을 부르기 위해 조 감독은 영화를 만들었다.
“돌아가신 20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소녀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따뜻한 밥 한 술 뜨게 하고 싶어요” 조 감독은 작은 소망을 말했다. 그저 밥 한 술. 따뜻한 방에서 갓 지은 밥에 김치 한 조각.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가족들. 소녀들에게 그보다 좋은 밥상은 없을 것이다.
‘의미 있는 일’이란 이름 아래 모인 많은 사람들. 그들의 바람은 단 하나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너무 끔찍하다. 그래서 그것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조 감독은 말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추모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후반 작업에 들어간 ‘귀향’은 배급사를 찾지 못해 개봉에 난항을 겪고 있다. 영화의 개봉을 위해 해외 시사회나 국제영화제 참가 등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인터넷을 통한 무료 배포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로 투자계약서 자체에 배급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인터넷을 통해 무료 배포한다는 조항이 있어요. 영화계에 전무후무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뜻이 맞는 배급사가 나타난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죠.”
조 감독이 ‘나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달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것. 조 감독이 영화를 시작한 2002년 이후 현재까지 8분이 돌아가셨고, 47분만이 남아있다. “할머니들이 바라시는 건 별게 없어요.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것과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일본은 아직도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격하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최근 흥행한 영화 ‘암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두 명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수십만의 소녀들을 대신해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 그것은 바로 ‘기억’하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글/ 차은희 기자
사진/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차은희 기자  cidmsl@bok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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