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간의 사회복지경험을 뒤로하고 이제는 봉사활동에 매진하고 싶다는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 정재원 사무총장. 17년을 고스란히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에 몸담은 그가 지난 3월 임기를 끝으로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를 떠났다. 가는 사람은 뒤도 돌아보면 안 된다고, 임기가 끝나고 나면 그림자도 비추지 말아야 남아있는 사람들이 편하다고 이야기하는 단호함 뒤에는 누구보다 협회를 아꼈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좋아서 시작한 사회복지 인연
지난달로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를 떠난 정재원 사무총장
"중학교 2학년때 국제적인 봉사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상도동에 있는 보육원을 위문 간 적이 있는데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처음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일을 해야겠다 라고 막연하게 마음 먹었던 게 동기가 됐나봅니다"
사회사업이나 복지라는 것의 개념도 없던 시절 우연히 찾았던 보육원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고 그 날의 봉사활동이 마냥 뿌듯했던 15의 소녀는 이제 예순이 넘어 은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건 23년 전 지인의 소개로 모자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였습니다. 하다보니 일이 너무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하다보니 일이 재미있고 좋아서 무작정 열심히 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된거라며 지난날을 추억한 정 사무총장은 "처음에는 사회복지가 뭔지, 노인복지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공부를 같이 시작했습니다. 사회복지에 관한 책도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사회복지를 번역했던 책을 가지고 공부했는데 당시로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딱 20년 뒤져 있더라고요"라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사회복지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배우는 것 자체가 힘든 과정이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일을 즐기는 사람앞에서 무릎 꿇는다고 했던가. 정 사무총장의 일에 대한 열정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먼저 다가섰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했으리라 짐작했다.
"여기저기 쫒아 다니며 지원재단을 모으고 내딛었던 것이 발판이 돼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할 때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그 당시 삼성복지재단에서 지원 프로그램을 막 시작했는데 노인복지쪽으로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재단들을 모으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에너지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너는 그때가 최고로 행복해 보였다고…."
그렇게 시작한 협회 근무가 벌써 17년을 맞았고 그동안 3명의 협회장과 호흡을 맞췄던 정 사무총장의 은퇴는 그래서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 싶었다.
"솔직히 퇴임이 눈앞에 올 때까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은퇴 후를 준비하고 난 상태였지만 3월 중순까지도 진행되는 일들이 많아서 잊고 살았다는 말이 사실입니다"
퇴직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실감한다는 정 사무총장은 인터뷰차 기자가 찾았을 때도 퇴직 하루를 앞두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노인복지시설협회에 몸 담은지 17년이란 세월동안 이곳에 묻어 놨던 발자취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정리해야 할 문서도 많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떠나야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쉬고 있을 여력이 없습니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더 그만 나왔으면 싶을 텐데 그게 잘 안되네요"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던 정 사무총장의 모습에서 복지현장을 떠나는 자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해결못한 과제, 아쉬움이 더 커
얼마전 노인장기요양보험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노인복지시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국노인시설협회로 관심이 쏠리면서 법안통과와 함께 협회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적인 입장으론 노인장기요양보험법안의 운영주체가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시설운영이 잘 되도록 또 직원배치가 잘 될 수 있도록 수가만 적절하다면 인프라 구축이야 국가가 하는 몫이고 협회는 맡은바 역할 안에서 최선을 다해 움직면 되는거죠" 정답을 말하고 있지만 의지가 있는 말이었다.
"법이 공포되면 시설협회 역시 민감하게 대응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가에 대한 문제가 실상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시설에 입소한 이들은 등급이 정해지는데 얼마나 효율적으로 배치되고 운영이 되는가에 따라 차이를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회보험으로 운영되는 점, 본인부담금이 부과되는 점은 여전히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정 사무총장의 얼굴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일을 해결하던 능숙함은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짚는 것으로 되돌아오며 사회복지사들의 처우에 대한 염려로 끝을 맺었다.
"사회복지사들의 처우에 대한 염려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사회복지시설에 들어왔을 때 급여가 22만원정도였습니다. 20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의 사회복지종사자들의 임금은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최저임금에 빗대 봉급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가 염려하는 부분은 노인장기요양보험법안이 도입됐을 때 정부가 책정한 수가를 가지고 직원급여가 지금의 사회복지시설 인건비와 동일하게 갈 수 있느냐입니다. 사회복지에 종사한다고 하면 다들 봉사심으로 일을 한다는 경향이 있지만 복지는 이제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직원들도 근로기준법에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사실 사회복지시설에서 근무하고 있는 종사자의 문제는 얼마전부터 이슈가 되고 있다. 과도한 업무와 비현실적인 임금체계, 열악한 복지문제가 고스란히 시설의 서비스 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등장하면서 처우개선의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새삼 지금처럼 인지도가 높았던 것도 아니고 넘치는 것보다는 부족한 부분이 더 많았던 복지계에서 23년을 버티게 했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협회 목표가 내 목표가 되고 그 목표를 이루고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 그렇게 하나씩 이뤄냈을 때의 희열, 비록 현장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이래도 그런 열정이 여태 저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해가 바뀌면 새로운 계획이 세워지고 세워진 계획을 하나씩 이뤄가는 과정에서 발전과 성숙을 거듭하는 동안 우리나라 노인복지시설협회의 발전은 시나브로 이뤄졌는지도 모른다.
17년을 협회와 함께 하면서 가장 만족할 만한 결과는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대해 '잘 해놓고 나가는 건 없다'고 손 사례를 치는 정 사무총장은 복지현장에서 있다보니 남들보다 발빠르게 고령화를 실감하고 그것을 문제화시켰을 뿐이라고 했다.
"2002년쯤부터 노인복지에 대한 문제가 이슈가 됐던 것 같습니다. 시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여전히 냉담했지만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우리로서는 기초생활수급자도 아닌데 가족이 돌보지 못하는 중산층 이하의 가족들에게 실비시설이 매우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 말에 귀기울여 주는 곳이 별로 없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자체적으로 조사해 책정했던 인프라 양도 지금 보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무료시설의 30%는 중산층 이하가 들어갈 수 있지만 기초생활수급자가 워낙 많다보니 중산층 이하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다는 소리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안이 도입되면 돈 있는 사람들은 좀더 나은 유료시설로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보험 형식으로 일정액의 본인부담금을 지불하고 노인복지시설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들을 위한 준비가 선행돼야 폭발할 듯 증가하는 고령 사회를 감당할 수 있다는 충고다.
준비된 사회복지사가 좋은 위치서 일할 수 있어
"이젠 사회복지도 경영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처럼 이윤추구를 최고의 목표로 정해놓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은 돈으로 어떻게 큰 효과를 내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복지 마인드로 가야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social worker의 궁극적인 목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니까요"
사회복지에 경영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적은 돈으로 최고의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을 통해 어제까지의 대한민국 사회복지 위치를 실감하는 것 같았다. 예산분배와 국가적 혜택의 우선순위에서 늘 뒤쳐져야 했던 우리나라의 복지는 이제라도 한발 앞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앞으로 이 분야에 들어오게 될 사람들은 마음이 움직여서 참여했으면 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쪽 분야의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있던 자리에서만큼은 골드칼라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어느 부서의 누구한테 가면 그 분야의 모든 정보는 다 있다는 식의 전문성과 책임감이 복지마인드로 형성돼야 보다 나은 곳에서 사회복지를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해서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준비돼 있지 않은 사람은 좋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전문적인 공부가 아니더라도 사회전반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갖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해라, 준비해라 다그치는 모습이 역락 없는 어머니다. 새내기 사회복지사들에게 바라는 욕심이 많은 만큼 애정도 비례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은퇴 후를 이미 몇 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정 사무총장은 협회를 떠남과 동시에 자원봉사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은퇴 후 자원봉사활동 하고 싶다
"봉사도 건강할 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건강이 뒷받침하고 의욕과 열정이 남아있어 몸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시도해 볼 생각합니다. 실상 그동안 협회 활동을 하느라 현장에서의 스킬은 못 배운 게 많습니다"
현장에서 현실적인 기술을 배워 봉사활동에 매진하고 싶다는 정 사무총장의 계획은 한 두해 고민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사회복지쪽에 몸담고 있다보니 보고 듣는 것들이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고 은퇴를 하고나도 이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어쩔수 없음이 결국 정 사무총장의 다리를 묶었다.
"제가 23년을 복지계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를 복지에 몸 받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협회를 떠난다고 해서 사회복지와의 인연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동안은 기초를 세우고 뼈대를 구축하는 과정에 몸담았다면 이제부터는 제가 세웠던 기초와 뼈대 속으로 들어가 현장에서 활동해 보고 싶습니다"
그냥 좋아서 시작한 일이 어느덧 23년을 지속하게 되고 한국사회에서 여자로서 겪는 고충을 이겨내고 사회복지의 발전을 지켜봤던 정 사무총장. 프로그램면에서는 외국보다 더 나은 면이 많으니 기능 보강쪽에 힘을 기울이면 대한민국도 살기좋은 복지국가가 눈앞에 펼쳐지지 않겠다는 그녀의 마인드에서 제대로 된 social worker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희정 기자 hans@bokjinews.com
서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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