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기시다 외무상에게 “결말이 나면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라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는 협정에 일본 정부가 사활을 걸었다는 얘기다. 우리는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조약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포함한 한일 양국의 역사와 관계를 반 백년이 지금까지 올바로 정리하지 못하게 한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우리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졸속 협상 결과를 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통보받는다. 한일외교장관회담 기자회견문은 ‘인간의 존엄’을 그들끼리 자부하는 ‘국가의 위엄’과 맞바꾸었음을 부끄러움 없이 시인하고 있다. 참담하다.

미국의 태도도 당시와 같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미국의 군사경제적 블록화 전략에 기인한 것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정부는 이번 협상 결과를 두고도 ‘박수갈채’를 보낸다고 밝혔다.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약화된 위상을 만회하려는 ‘재균형(rebalance)’ 전략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한국은 대중국관계의 훼손과 남북한 긴장관계를 감수할 수 밖에 없게 됐고,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종속적 군사안보서열은 더욱 고착화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협정이 “TPP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미국의 평가와 한일 양국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의 TPP 참여 및 FTA추진설은 또다시 경제개방 압력이 불어닥칠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한일기본조약 이전 굴욕적 협상에 반대해 1964년 6.3항쟁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사회 주류가 된 지 오래고 그중에는 대통령이 된 자도 있다. 하지만 그 대통령이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을 밀실에서 추진하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은 사건이 상징하듯, 한국사회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제국주의로부터 가장 깊숙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존엄과 권리를 또다시 군사주의와 경제개방으로 희생시켰다. 단순한 국가 대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제국주의, 군사주의, 경제개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청산하지 못했던 지난 반백년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몰지각한 처사는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문제의 결과에 가까울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박근혜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 다만 그와 함께 이번 졸속 협상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저들이 ‘최종적’, ‘불가역적’이라고 못박으려는 협상 결과를 가변적이고 유보적인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법적 논리로 살피더라도, 피해당사자의 사죄와 손해배상 요구가 여전한 조건에서 피해당사자 동의 없이 가해국과 피해자가 속한 국가 양국 정부간에 이루어진 합의는 유효하지 못하다. 법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피해당사자의 관점으로, 피해 발생의 원인과 배경을 따져봐야 한다.

우선 이번과 같은 협상 결과를 유도 내지 강제한 힘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묻는다. 안보가 무엇인가. 한국의 역대 정부가 말해온 ‘안보’는 인간과 생명을 얼마나 지켜왔는가. 정권의 안보를 지겹도록 국가의 안보로 치장해왔을 뿐이다. 경제가 무엇인가. 틈만 나면 입에 올리는 ‘경제’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살림살이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경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여전히 성장주의의 그늘에서 떨고 쓰러지는 생명들이 숱하다. ‘안보’든 ‘경제’든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중심임을 자부하는 이들의 경비(警備)가 되고 경비(經費)로 쓰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를 은폐하고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국가 대 국가’라는 구도만 작동됐다.

우리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잠시 ‘격분’하는 것을 반복하는 식으로 일본 제국주의 문제를 대해왔다. 그러면서 막연하고도 위험천만한 부국강병 논리로써 평화지대를 밟아버리는 나라를 만들고 말았고, 역시나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경제적인 이익을 들먹이며 시민의 권리와 먹거리의 근간을 짓밟는 사회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나라가 그런 식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합의하는 것은, 이런 사회가 그런 정부, 그런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사실 별난 일도 아니다.

깊은 반성과 이에 근거한 치열한 투쟁이 없다면 폭압의 피해자들은 더욱 더 험하고 누추한 곳으로 떠밀려갈 것이다. 이제는 ‘평화가 무엇이냐’, ‘존엄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선행하는 시간이 돼야 한다. 그래야 ‘안보가 무엇이냐, 경제가 무엇이냐’는 의문에 답할 수 있다. 이제 50년간의 잘못과 착오를 반복하지 말자.

2015년 12월 29일
녹색당

박미리  shmr28@bokji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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