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앞, 시끄러운 경고음 앞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답답할 만큼 천천히 움직였다. 순간을 기다리지 못한 젊은 운전자가 '나이 들었으면…'으로 시작하는 막말로 기어이 길을 건너던 노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너도 늙어봐라' 허심탄회하게 혼잣말을 건내던 노인은 괜히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성을 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고 팔다리가 내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면? 두 칸씩 오르던 집 앞 계단이 산을 오르는 것 이상으로 힘에 부친다면? 세상이 어떻게 느껴질까.

"어떻긴, 돈이고 권력이고 늙으면 그저 젊은 사람 환한 웃음과 건강함이 제일 부러운 법이지." 서울에 있는 한 노인복지관에서 현재 가장 소망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한 노인이 답한 대답이었다. 환한 웃음과 건강함이라….

"나이들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어"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관악노인종합복지관을 찾아 노인체험을 위해 어르신 체험센터를 방문했다.

흐리다 맑다를 반복했던 변덕스런 봄 날씨. 모처럼 화창한 오후를 감사하며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관악노인종합복지관(관장 김종만)을 찾았다. 2007 관악구 노인일자리사업으로 선정되면서 활기를 띄고 있는 '어르신 눈높이 체험'을 위해서였다.

어르신 눈높이 체험은 특수 제작된 장비를 이용해 아동과 청소년, 청년이 직접 노인의 신체적 노화정도를 경험하고 그로 인해 노인의 심신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자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특히 노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최근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다.

"노인체험 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 젊고 건강한 몸은 잠시 잊고, 노인이 되는 체험을 돕게 될 오늘의 강사 이훈구, 이은희, 안옥순이라고 합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문 앞에서 취재진을 맞아준 사람들은 건장한 젊은이들이 아닌 어르신 강사들이었다. 달뜬 목소리만큼이나 생기가 넘치던 노인강사들은 차분하면서도 능숙한 어조로 노인체험 과정과 왜 이런 체험이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했다.

"노인이 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늙는 것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죠. 나도 젊었을 때는 어른들이 왜 '아이고'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젠 버스를 오르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나도 모르게 '아이고'를 연발하는 노인이 됐습니다."

노화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나타나는 퇴행적 변화를 말한다.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신체기관과 장기가 하나둘 소모되고 연륜과 주름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걸음이 더뎌지고 감각이 무뎌지며 쉽게 다치고 몸이 약해지는 현상….

욕실체험을 통해 세면대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 물의 사용으로 바닥이 미끄러운 욕실의 경우 관절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안정봉 설치가 의무화 될 필요성이 있다.

 
흔히들 젊음을 쏜살에 비유하곤 한다. 한평생 건강하고 젊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흰머리가 검은머리 보다 많아지고 주름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쉽게 건너던 횡단보도가 골치 아픈 과제로 변하는 시점에 젊음은 몰인정하게 사라져버린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때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아저씨 아주머니에서 할아버지나 할머니로 바뀌면 왠지 모를 서러움에 복받친다고 한다. 

"50세가 넘어서부터 찾아오는 노화 증상 때문에 중년기 여성들은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하다 못해 꽃바람이라도 불어오는 봄이면 친구 서넛이 모여 등산이라도 실컷 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환자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십상이거든요."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너도 늙어야 내 맘 안다' 등등 어르신들의 세월에 녹은 푸념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젊은이 위주의 편의시설, 고개숙인 노인들

노인체험을 위해 먼저 하얀색 면 장갑을 끼고, 팔꿈치보호대를 착용한 다음 어깨 고정기와 무게 조끼를 걸쳤다. 멀쩡하던 어깨가 자연스럽게 굽어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관절을 고정하고 무릎보호대를 착용하자 걷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걷는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해 온몸을 움직이는 동작을 취해야 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발목보호대와 손가락 관절 고정기를 착용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노인강사들에게 몸을 의지하게 됐다.

청력기능을 떨어뜨리기 위해 착용한 귀마개, 시력기능 약화를 위한 안경 착용 이후엔 벗어버리고 싶은 갑갑함이 온몸을 엄습해 왔다. 20대 후반인 기자는 간단한 복장 착용 후 65세를 눈앞에 둔 할머니가 됐다. 머리만 검을 뿐이었지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시력을 체험하기 위해 착용한 저시력용 안경을 착용하고 나면 비슷한 색깔의 글씨나 작은 글씨는 구분하기가 어렵다.

시야가 흐릿해지자 좀 전까지 자신감 있게 내딛던 발길이 제일 먼저 말썽이었다. 팔꿈치와 무릎에 고정된 도구는 관절의 움직임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고 단지 관절의 동작을 제안했을 뿐인데 다리와 팔은 천근만근이었다. 중심이라도 살짝 흐트러지면 계단이나 내리막길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지금부터 계단을 오르고 사물을 만지고 소리와 시력에 대한 테스트를 계속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좀 전까지 익숙했던 공간들이 사라지고 강사들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모든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체험장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방향을 못 잡고 있을 때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늘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답니다" 노인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환영하는 걸까. 긴장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체험을 도와준 가이드는 달력 앞에서 숫자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어렴풋이 글씨가 보였지만 자세가 우스워졌다. 고개를 앞으로 뺀 다음 퀴즈를 풀 듯 대답을 이어갔다.

"착용하신 안경은 노년기에 발생하는 눈의 상태와 비슷하게 제작된 것입니다. 글씨는 보이지만 한번에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또 작은 글씨나 비슷비슷한 색깔의 글씨도 구별하는데 어려울 겁니다."

불현듯 서울시내를 활보하는 버스가 떠올랐다. 녹색바탕에 검은 글씨, 파란색 바탕에 검은 글씨는 좌우 시력이 비교적 양호한 편에 달하는 기자의 눈에도 가끔 헛갈리는 대상이었다. 분명 젊고 건강한 누군가가 디자인했으리라.

"어느 순간부터 버스 타기가 겁나더라고요. 10분, 20분 기다리다 차를 놓쳐 버린 경우도 많고, 빨리빨리 못 탄다고 버스기사가 구박이라도 주면 왜 그렇게 서럽던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노인 가이드가 꺼낸 이야기였다. 지금은 조금 힘들더라도 차라리 걷던지 지하철을 이용하는 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체험도구는 대체로 이해가 갔는데 하얀색 면 장갑을 착용한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사물을 만지면 미끄럽고 잘 잡히지 않죠? 노년기에 들어서면 손에서 땀이 잘 나지 않습니다. 장갑을 낀 것처럼 손끝이 미끄럽고 갈라지고 그래서 같은 물건을 집어도 잘 떨어뜨리고 쉽게 집어 올리지 못해요."

장갑을 끼고 플라스틱 블럭을 맞춰보니 그 느낌이 어떤지 쉽게 이해가 됐다.

화장실·계단 등 주거문화 먼저 바뀌어야

그러나 화장실만큼 난해한 공간은 없었다. 우선 바닥이 미끄럽지 않을까 조심하게 되면서 세수를 위해 세면대 앞에 섰지만 마땅히 몸을 잡고 의지할 곳이 없어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노인부부가 거주하는 주택이라면 무엇보다 부엌과 욕실에는 안전봉이 필수여야 합니다. 관절이 부자연스러운 노인의 경우엔 앉았다 일어설 때 몸을 지지해 줄 곳이 절실해요. 특히 욕실은 물을 사용하는 공간이라 넘어질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산 넘어 산이다. 욕조에서 힘겹게 나오자 계단이 반기고 있었다. 평소 한걸음에 오를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경사도가 차츰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난간을 의지하게 됐고 지팡이도 그 순간만큼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릎관절을 고정한 도구 안쪽으로 뚜둑, 뼈 부딪히는 소리와 약간의 통증이 동반됐다.

지하철을 오르내리던 노인들이 10계단 쯤 올라선 뒤 허리를 펴고 한숨 고르던 모습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새삼 그런 노인들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며 신경질적인 시선을 보내진 않았나 반성하게 됐다.

"지하철 5호선과 7호선이 있는 곳에선 들어서기 전에 한숨부터 나옵니다. 그래도 지금은 대부분 전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전에는 돌아가더라도 걷는 편이 나았어요."노인들에게는 역 계단 오르기가 힘든 여정이었던 셈이다. 계단을 마지막 코스로 복지관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60세가 넘어서면서부터 노화를 경험하게 되면 작은 일에도 소심해지고 주눅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하철을 탈 때도 젊은 사람들에 비해 몸이 불편하다 보니 자리가 있으면 당연히 앉고 싶은 마음이 들죠. 하지만 양보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일으켜서 그곳에 앉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노인이 탔다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양보는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하단 생각이 듭니다. 앉아 있어도 가시방석일 때가 종종 있거든요"

우리는 항상 으레 자리를 양보한 우리의 입장만을 생각했을 뿐 그 자리를 양보 받은 노인들의 입장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자리를 양보 받으면 고마운 생각도 들지만 '나 땜에 저 사람에게 괜히 피해가 간 건 아닌가'를 걱정한다는 노인들. 그런 생각 뒤로 '내가 벌써 자리를 양보 받을 만큼 늙어 버린건가'라는 아쉬움도 남는다고 했다. 체험이 끝나고 체험도구를 풀면서 빨리 빨리로 무장된 대한 민국 곳곳이 노인들에겐 장애물 자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변화를 가져온다

 일본의 경우 노인의 신체에 맞게 선반을 낮추고 가격표의 글씨를 키운 편의점이 노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매출 상승을 가져왔고 노인의 신체 조건을 감안한 작업공간으로 생산라인을 정비한 기업은 인력난을 해소한 사례가 있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고령자용 국민임대주택 입주자 선정기준 및 설계기준과 고령자용 공동주택 표준설계기준을 마련하고 올해 노인주택 공급ㆍ관리ㆍ운영체계, 공급자 자격 및 자원규정 등을 담은‘고령자 주거지원법(안)’을 제정키로 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특히 미끄럼방지시설 설치 등 노인가구 주택개조 매뉴얼 및 안전기준을 마련하고 이 기준에 따라 개조 시범사업을 실시한 뒤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밝힘에 따라 노인편의시설에 대한 진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경찰청 역시 노인복지시설의 주요 출입문을 기준으로 지정된 300m 내 보호구역에서는 구간별·시간대별로 자동차 통행을 제한하고 주차장 설치도 금지하는 규칙 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이른바 '실버존'의 활성화를 전한 바 있다. 그러나 노인주거문화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선진국과 같이 노인전용주택이 보급되고 도심 곳곳에서 통행이 편리한 생활로 전환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반응이다.

이런 변화는 정부와 일부 기업의 노력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공감대 형성과 지지를 얻어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경제적이기까지 하다. 국가 및 기업 경제 활성화에도 매우 많은 도움을 줄수 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노년에 이르는 전 생애 과정을 지역 사회에서 융통성 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고려하므로 사람들에게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고 이용자의 변화에 따라 다시 개조해야 하는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최소의 재정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작은 관심과 배려가 노인과 장애인 임산부 등과 같은 교통약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머지않아 노인이 될 우리 자신을 위해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노인체험센터를 나서기 전 체험을 주관했던 복지관 관계자는 "장애를 장애로 바라보지 않고 남과 조금 다른 성향으로 인식하자는 움직임처럼 노인도 신체가 조금 불편할 뿐 의지, 감정, 열정 등은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하며 "아직 우리사회에는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은데 그런 인식들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이라고 전했다.

서희정 기자 hans@bokjinews.com

서희정 기자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