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유도 모른 채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직 살아남은 여성들은 누구라도 그녀가 될 수 있음을 피부로 느끼며 일상적 공포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일부 언론의 태도는 무어라 할 말이 없을 만큼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살해와 같은 ‘묻지마 범죄’는 예외적 사건이 아닙니다. 명확한 통계가 말해주듯이 피해가 ‘여성에게만’ 집중된 범죄입니다. 개인의 무작위적 일탈이 아니며, 가해자 대다수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아주 보통의 남자들이었습니다.

여성살해의 역사는 가부장제의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국경을 초월해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살해한” 여성살해(femicide)가 있어왔습니다. 여성살해는 “단지 한 여성의 육체가 살해됨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한 여성의 죽음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자행된 수많은 여성들의 죽음이며, 모든 여성에게 가해지는 문화적 폭력의 종착점(백수진, 2009)”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여성살해의 개념을 도입한 형법의 개정이나 법 제정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제 맛이다”라는 말을 ‘속담’으로 누구나 아는 이 사회. 현실에서 여성들은 3일에 한 명 꼴로 친밀한 관계인 남성의 손에 살해되고 있습니다. 태아나기 전부터 성감별 ‘여아낙태’로 죽어야 했고, 그로인한 성비불균형이 지금 한국사회 위기 징후의 원인 중 하나로 드러나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성차별을 논하는 일은 이제 식상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추모조차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폭력을 경계해야하기도 합니다.

5월 18일 어제 우리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분들 기억하고 추모하는 한 편, 살해된 한 여성의 죽음 앞에 흰 국화꽃을 바치고 눈물 흘려야 했습니다. 최근에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인간의 본질을, 여성도 인간임을, 사회적으로 다시 성찰해하고, 정치적 애도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젠더가 삭제된’ 민주주의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모두의 민주주의를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딛고 나선 용감한 여성들이 고착된 젠더질서에 균열을 내는 주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젠더질서는 흔들리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젠더질서는 구축되고 있지 못한 위기의 시대,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는 생존자들이 보내오는 미세하지만 거대한 흐름을 포착해야 합니다.

강남역 10번출구 그 곳에 애도와 분노와 용기가 있습니다.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이 물결에 깊은 연대와 지지를 표하며, 정치의 몫을 찾아 함께 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녹색당

박찬정  bj402@bokjinews.com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