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산성동복지회관 이계존 관장

 정조는 정약용 등 젊은 실학자를 중용하여 조선의 고리타분함을 실사구시로 타파하고자 했다. 그가 효 라는 다소 보수적 이념으로 수원을 덧칠하였다하여도 실사구시의 정수(精髓)인 수원화성을 쳐다보며 필자는 속절없이 정조를 흠모한다.

오늘의 수원을‘수원’되게 한 거인으로 정조가 우선 생각되며 그와는 전혀 다른 면면을 가지지만 또 한 명의 거인이 또렷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갑부이던 김우영과의 사랑과 결혼. 당시로선 언감생심이던 유럽으로의 미술여행. 여행 중 최린과의 우정. 여러 이성과의 사귐이 굴레가 되어 염문에 시달리다 이혼.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생활. 행려환자로 전전하다 끝내 사망.

바로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9)이다. 그는 완고한 유교적 윤리가 강요되던 근대화 초기, 자신에게 강제되던 조선 여성으로서의 기구한 팔자를 도발적 인생 역정을 통해 실천적으로 극복한 신여성이었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자아에게 있는 것이외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혜석의 격분, 물론 오늘의 시각에서야 당연시된다. 그러나 봉건적 억압에 놓인 여성으로서는 과히 혁명적 사고이자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나혜석은 '인형의 가(家)'라는 시(詩)에서 한 가정의 장식품으로서만 존재하는 여성의 삶을 비판하며, 욕망과 의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여성 해방을 주장하였다. 또한 자신은 몸소 온갖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지난(至難)한 일생을 살았다. 

일부에서 나혜석을 부르주아 창녀로 혹평하기도 한다. 그는 금과옥조로 여기던 여성의 정조를 도덕도 법률도 아니고 오직 취미라고 얘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언급 등에 근거할 때 나혜석에 대한 혹평이 일견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보수 일편의 분위기에서 그 억압을 깨는 자에게 고답적인 순수의 요구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분명 그의 삶이 가진 하나의 흐름은 너무도 분명하기에 필자는 일부 흠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역을 적극 지지한다.

보수적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는 수원에서 나혜석이라는 희대의 상징이 태동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효의 정조 그리고 반역의 나혜석, 이 둘의 상징은 너무도 상반되는 대척적 양태지만 수원이 수원되기 위한 그 공간에서 그 둘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하나는 아니지만 역시 둘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관계인 것이다.

정조와 나혜석에 대한 필자의 사숙(私塾)은 특정 지역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우선 정조는 실사구시를 통해 국리민복을 증진하고자 했기에 탁월한 실무자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정조는 무익한 담론에 빠지지 않고 실제 이익에 기여하는 학문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거중기 등 실용기술을 적극 개발하고 활용하였으며, 자신의 이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하여 중용하였다. 또한 화성의궤 등을 통해 자신이 수행하는 구체적인 바를 기록하여 성찰하고 끊임없이 개선하였다. 실사구시 학문의 강조, 실용 기술의 중시, 인적 자원의 활용 그리고 전문적 성찰과 개선 등은 오늘날 실무자의 업무수행 방식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규정된 여건에서 효과와 효율을 중시하여 책무성을 달성하고자 진력하는 그 모습은 역량 있는 실무자의 한 전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편 나혜석은 실무자가 자기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가지며, 전문가적 소진(消盡)을 경험할 때 너무도 든든한 하나의 위안이 된다. 실무의 근본 지향이 모호하고 그 실무환경이 척박할 때 개인적으로 소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도전적 ‘가능성’이 있음을 나혜석은 제시한다. 또 그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대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화를 위해 실천적 참여가 요구됨을 나혜석은 역설한다.

정조 류의‘사실성’은 일상에서 꾸준히 추구되어야 덕목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일상적 자기를 성실히 추구하는 사실성은 하나의 미덕이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서 각 개인은 던져진 존재로서 규정되기에 때론 그 사실성에 속박될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성의 속박을 탈피하고 뭔가를 새로이 추구하는‘지향적 존재’의 전형을 바로 나혜석이 실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을까. 나혜석은 던져진 존재로서 소극적으로만 자신을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체적인 자기존재를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기획 투사의 ‘가능성’이 필수적임을 역설하였다.

일상에서 정조 류의‘사실성’을 가지며 때로는 새로운 지향을 위해 나혜석 류의‘가능성’을 가지는 것, 이는 서로 대립적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사실성에 매몰될 수 있는 존재가‘스산한 성찰’로 가능성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보다 굳건한 새로운 사실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존재가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사실성과 가능성은 묘합(妙合)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량 있는 사회복지 전문가를 지향하며 정조와 나혜석을 사숙하는 근본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필자는 비록 열악할지라도 주어진 사회복지의 업무환경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실성의 전형을 정조에게서 그리고 새로운 복지정신을 고뇌하며 추구하는 가능성의 전형을 나혜석에게서 각각 찾은 것이다. 또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인물의 극적인 묘합을 수원에서 보았던 것이다. 수원에서 정조와 나혜석을 생각하며, 사회복지사로서 사실성과 가능성을 묘합하는 쉼 없는 정진과 성찰이 계속되어야 함을 다짐한다.

서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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