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아직도 잘 모르는 일이 있다. 대다수의 시각장애인들이 TV와 매우 친하다는 사실을, 친해도 너무 친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들은 뉴스, 드라마, 스포츠, 연예에 관한 정보를 TV를 통해 얻어내며, 유명 앵커와 잘 나가는 PD들의 이름까지도 꼼꼼하게 체크할 만큼 몰입도가 높다. 이와 같은 문화적 현상은 화면해설방송이 있기 전부터 보편화 돼왔으며, 선호하는 프로그램과 방송사에 대해서는 강한 애정과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이 TV에 보내 주는 애착과는 달리 여러 방송사들은 ‘NEXT'라는 자막을 음성과 함께 얼른 처리해 버리며 시각장애인들을 오랫동안 대놓고 외면해 왔다. 이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전국 50만 시각장애인들이‘NEXT’ 퇴출 운동에 나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기다리다 지치는 시각장애인
방송사는 정해진 편성표에 따라 프로그램을 방영하는데, 하나의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음 송출될 방송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상파의 경우 KBS2 TV, MBC TV, SBS TV등이 ‘곧이어 *****가 방송됩니다’라고 자막과 함께 친절하게 다음 프로그램 안내를 음성으로 고지해 준다.
그러나,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이라는 KBS1 TV와 자회사가 운영하는 각종 스포츠, 드라마, 뉴스 채널과 대다수의 종편 방송사, 케이블 방송사들은 다음 방송될 프로그램에 대해 아무런 공지를 하지 않거나 ‘NEXT’라는 짧은 멘트와 함께 프로그램 명칭은 자막으로 처리해 버린다. 그러다 보니 오롯이 소리에 의존하며 TV를 접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순간 답답해지고 다음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약 2~3분 전까지는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고 만다.
영어로 다음을 뜻하는 NEXT를 목청껏 외쳤다면 그 다음의 프로그램도 우리말로 시원하게 음성을 삽입해야 하는 것을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영어는 음성으로, 우리말은 아예 없애버리고 만 것이 대한민국방송사들의 엇나가고 일그러진 모습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15년 동안 주장에도 개선없는 방송사
시각장애인 단체와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이 답답한 상황을 각 방송사 별로 개선과 보완해 줄 것을 Next가 도입된 지난 2001년부터 무려 15년이 지나는 오늘까지 요구했으나 방송사는 ‘컴퓨터의 고장으로 처리가 불가능 하다’, ‘아나운서와 스튜디오가 없어서 할 수 없다’, ‘비용이 많이 들어 당장은 어렵다’는 답변을 늘어놓았다.
이에 시각장애인들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KBS1 TV는 말로만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이라고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는데, 왜 아직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정보 접근권을 제공하지 않는지 큰 소리로 묻고 싶다. 시각장애인들은 국민이 아니어서 정성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소리높였다.
또한 “더 한심하고 답답한 것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채널까지 운영하는 KBS가 시각장애인을 이해하기는커녕 방송의 시·청취접근의 외면 주최자요 이를 조장한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거다”라며 “최근 종교채널인 CBS는 시각장애인들로부터 다음 진행될 방송에 대해 음성으로 고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사장이 직접 나서서 3주 만에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한 후, ‘그 동안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오히려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제 CBS TV는 매우 친절하게 시각장애인들에게 한 걸음 다가와 더욱 다정한 벗이 됐다”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에 친절한 TV조선과 MBN
하지만 개국 후 초심을 잃지 않고 프로그램을 음성으로 소개하는 종편채널들이 있다. TV조선과 호기심채널 MBN이 그 곳이다. 이 두 종편채널은 방영할 프로그램을 음성으로 고지해 주고 프로그램 광고 때엔 방영시간까지도 친절하게 안내하는 센스를 보여주고 있다.
NEXT. 대체 이게 무엇이기에 이리도 방송사들이 그토록 사수하려 몸부림을 치는 걸까? 언뜻 보기에는 다음을 뜻하는 우리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시각장애계는 “NEXT에 목을 매는 건 영어로 힘 있게 외치고 자막을 펼치면 세계화 된 선진방송이요. 우리말을 음성으로 담으려니 왠지 촌스럽고 우물 안 개구리방송이라는 틀에 갇혀 있어 NEXT에 목매어 있는게 아닌가 싶다”며 “우리는 그런 방송사들의 소비자들인데 소비자들을 뒤로 하고 자신들만 국제화시대를 걷는다는 그 발상 자체가 바로 병에 걸린 우물 안의 개구리임을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랄뿐이다”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기에 시각장애인들은 장애인의 날이 오더라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 장애인의 날 특집물을 제작 방송한다 하더라도 결코 반갑거나 기쁘지 않다. 시각장애라는 이유로 미디어 소비자의 반열에서 제외됐다는 아픈 사실 때문이다.
‘NEXT’를 빨리 정리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화면에 나타나 다음 방송 프로그램의 명칭을 또박또박 읽어줘서 시각장애인의 답답함이 어서 해소되기를 바란다. 

 

글/ 이유정 기자·사진/ 한국시각장애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