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란 장애의 정도에 따라 교육, 의료 등을 지원하고자 등급을 매긴 것으로 ‘장애인 복지법 시행규칙’에 장애인의 장애 등급표를 규정하고 있다. 장애 등급은 의사가 장애를 판정할 때 필요한 표준 진단방법을 제시할 목적으로 장애판정 기준에 따라 그 등급을 분류하며 모든 등급은 단계가 낮을수록 장애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등급이 낮을수록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증대되며 이 혜택 안에는 자립자금, 의료비, 기초생활비, 자녀부양비 등 그 종류 또한 다양하고 그들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범위 또한 넓다. 하지만 장애계는 이런 장애등급제를 폐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 반영 전혀 못하는 등급제
장애등급제는 1988년 장애등록제와 함께 도입이 됐다. 당시 이 제도는 장애인에 대한 거의 모든 복지서비스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신체장애가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장애등급이 몇등급인지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현재 1등급에서 3등급까지의 장애인들은 장애인연금과 활동지원서비스, 전기와 도시가스 요금 50%할인, 항공요금 50% 할인요금을 받고 있고, 소득세도 공제된다. 그리고 4등급에서 6등급까지는 경증장애수당, 항공요금 30% 할인, 소득세 공제를 받고 있지만, 활동지원서비스와 전기, 도시가스는 지원받지 못한다.
장애인단체들이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장애인 각각의 장애유형과 처한 여건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등급판정 기준이 지나치게 의료적 기준으로 편향돼있기 때문이다.
또한 등급판정이 검사를 받을 때마다 다르게 나오거나 현실적이지 못하는 등 장애인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장애종류에 따른 형평성이 맞지 않는 불합리한 점들이 많다. 장애를 단순히 신체에 대한 문제로만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이 등급에 따라 낮은 등급의 장애인들은 지원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한받기도 한다. 서울 일부지역에서는 장애인들의 이동을 위해 휠체어리프트가 장착된 차량 지원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이조차 1~3급 장애 등록자만 가능하다. 거동이 불편해 서비스가 필요하더라도 4급 장애 등록자부터는 서비스 이용이 불가하다. 행정상의 편의만 고려된 장애인등급제로 많은 장애인들의 복지가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장애등급을 증명하기 위한 각종 검사에 드는 비용마저 장애인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우리는 고깃덩어리가 아니에요
발달장애인 김모씨(38)는 “아무도 몸에 매기지 않는 등급을 장애인의 몸에 매기는 제도가 장애등급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도는 장애인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라가, 공무원들이 편하려고 만들어진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1급 장애인’, ‘6급 장애인’이라고 불린다”며 마치 정육점의 소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또한 지적장애인 노모씨는 “우리 몸에 등급을 매기는 건 의료 전문가들이에요. 내 몸이 얼마나 손상됐는지 판단해주죠. 1, 2급이 아니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없다”며 “그래서 우리는 공무원들에게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어려운지’ 끊임없이 설명해요. 그래도 잘 듣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제 몸만 봐요. 손을 얼마나 움직이는지, 하체는 얼마나 마비됐는지, 아이큐는 얼만지 그 사람들은 제 몸 상태만 궁금해하죠”라며 “내 상태를 끊임없이 설명해야한다는 것이 비참하게 만들어요. 또한 언제 기준이 강화돼서 등급이 떨어질지 모르는 늘 두려움 속에 살아가야해요”라고 말하는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청각장애 2급인 박모(35) 씨는 자신의 장애를 증명하기 위해 이비인후과에서 회당 30만~40만원을 들여 3번의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100만원이 훌쩍 넘는 비용을 모두 본인이 떠안아야 했다.

 

장애등급제 개선엔 YES, 전면 폐지는 NO!
장애계의 이러한 주장에 보건복지부는 장애등급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전면 폐지 대신에 현행 ‘6등급’을 ‘중증’과 ‘경증’으로 나누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복지부는 “급속도로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꿔버리면 관련된 서비스나 제도에 무리가 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중증, 경증으로 2단계로 간 다음에 향후 점진적으로 폐지하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한 예로 장애등급제 개편을 위한 2차 시범사업에 참여할 지자체를 5월 29일까지 모집했다.
복지부는 “시범사업 참여의지가 있는 지자체를 선정해 서비스 종합판정을 통한 장애인 맞춤형 서비스 지원체계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며, 서비스 판정도구와 전달체계 모형의 적정성을 검증할 계획이다”라며 “세부적으로 지자체 ‘장애인서비스 심의위원회’ 구성과 운영계획, 대상자 서비스 연계지원, 이용자 모니터링, 새로운 판정체계 적용결과에 따른 활동지원급여 추가제공, 주간활동 등 신규서비스 시범적용 등을 진행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번 2차 시범사업은 11월 30일까지이며, 예산은 지자체당 9000만원이다.

 

‘보여주기 식에 불과’ 지적 나와
장애인들은 이것이 장애등급제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이는 사실상 제도의 폐해를 그대로 유지한 보여주기 식 행정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했다. 장애등급제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등급으로 분류하는 비인간적 태도, 사회적 낙인인데 제도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가 해소되긴 어렵기 때문이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초기에 공약으로 중증 경증으로 나누지 않고 바로 장애등급제 폐지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 자체를 또 어긴 것이다. 중증 경증으로 단순화하겠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며 불만을 강하게 드러냈다.

 

전 국민의 20%를 장애로 보는 미국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과연 어떨까? 이렇게 급수로 의학적인 손상으로만 6단계까지 나눠서 제공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 장애등급제를 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 등 몇 몇 나라 뿐이다. 일본도 현재 여전히 등급은 나눠져 있지만 등급에 의한 서비스의 문제들은 거의 무력화돼있다. 심지어 장애를 등록도 하지 않는 나라들도 있다. 그것은 장애의 범위를 굉장히 포괄적으로 보고 있는 나라들이다. 영국이나 서부 유럽, 미국같은 경우에는 장애를 전 국민의 20%까지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5%정도를 장애인으로 보고 있는데 장애인구가 그렇게 많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서비스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서비스별로 판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장애등급제의 폐지 관련 논의의 쟁점은 주로 제도의 폐지 이후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한 자격기준을 어떻게 설정한 것인가라는 주제에 집중돼있다.
정부는 지원서비스를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중증장애인을 선별하기 위해 기존의 장애등급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등급기준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이며 장애계는 어떠한 형태의 장애등급도 장애인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적절한 기준이 되고 있지 못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격기준 설정 문제를 넘어 먼저 고려해야할 사항은 장애인에게 지원서비스가 적합하게 제공될 수 있는 서비스 전달체계를 재정비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재원을 확충하는 것이다. 또한 정부와 장애계 이해관계자들간의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의 절차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글/ 이유정 기자
사진/ 전국장애인철폐연대·자료/ 국회입법조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