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존(수원여자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토요일 오후 시내 한 다방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되었음에도 여자친구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방 한 귀퉁이에 앉아 줄곧 출입문을 지켜본다. 처음엔 차가 막히려니  생각하며 기다린다.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자 초조해진다.
 ‘혹 약속을 잊지는 않았을까’, 아님 ‘오는 도중 교통사고라도 났을까’ 등등. 오만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여자친구가 집에 없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을 알아볼 겸 다방 한 구석의 공중전화로 여자친구의 집에 전화를 한다.
신호가 가고, 순간 긴장을 한다. 다행히 여자친구의 동생이 전화를 받는다면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전화를 받는다면 어찌 할까, 그냥 끊을까 등등. 마침내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중후한 목소리는 여자친구의 아버지임이 분명하다. 떨리는 자기소개 그리고 안부를 물은 후, 용건으로서 친구의 출발 여부, 그리고 그 시간 등을 정중히 묻는다.
처음 경계하며 굳은 목소리로 응대하던 친구의 아버님, 그러나 통화가 길어질수록 그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진다. 그리고 내색하지는 않았더라도 내심 딸의 남자친구에 대해 다소 대견해 하는 듯하다. 이 와중에 드디어 여자친구가 도착한다. 집에 전화해서 부모님과 통화했다는 얘기에 여자친구는 부모님이며 형제들에 대한 이러 저런 이야기를 해준다.

젊은 세대에게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이성과의 만남에 살포시 여며진 너무도 빈번했던 장면이다.

마루에 놓였던 전화, 이는 가족과 그 외부를 연결하는 유력한 소통 매체였다. 이 매체는 결코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지는 않았다. 물론 이따금 수다스런 누군가에 의해 상당시간 독차지되기도 했지만,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매체였던 것이다.

마루전화를 통해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식구들에 대해 조금씩 엿보기를 했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그리고 형제자매가 서로서로를. 그리고 엿보기는 그 자체로서만 끝나지 않았다. 물론 이따금 간섭으로 이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간섭일지라도 모든 엿보기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지향하였다.

딸의 남자친구와 통화하며 괘씸한 놈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놈의 목소리에 담긴 듬직함을 애써 떠올리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루전화에 의한 엿보기로써 아빠는 딸의 어른되어 감을 확인하며, 동시에 그 섭섭함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요즘도 그 마루 전화가 있을까? 전화를 통해 예전과 같은 가족간의 엿보기 그리고 서로의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대체적으로 그렇지 않다. 이제 소통 매체는 철저히 개인화되었다. 외부와의 소통하는 단위로서 가족은 이미 해체된 것이다. 그저 개인만이 의사소통의 유력한 주체로 단편화된 것이다.

문명의 이기(利器)에 의존함은 우리를 나약하게 하게 만든다. 하나의 단적인 사례가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일 것이다. 휴대전화의 등장과 보편화에 의해 우리는 원하는 즉시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너무도 많은 편리가 있다. 이제 만나기로 한 사람을 무작정 기다릴 필요가 없다.

휴대전화로 간단하게 기다리는 사람과 통화가 가능하여, 늦는 이유 그리고 도착 예정시간까지도 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통화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위치 추적도 가능할 지경이다.

이렇듯 휴대전화라는 문명의 이기에 의해 우리의 의사소통이 형식적으로 활성화되었음을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요즘의 의사소통이 즉시성을 가지지만, 반면 의사소통의 진정성은 상당부분 훼손되어 있다. 정보만이 오갈 뿐 깊은 의미와 내밀한 정서는 배제된다. 또한 개인적 의사소통만이 주류를 이루어 가족을 단위로 하는 의사소통 또는 그보다 더 큰 의사소통의 기회는 현저히 감소한다.

이제 휴대전화 없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심지어 휴대전화가 없는 경우 외출마저 못하는 극단적인 소외(疏外) 현상마저도 목격된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꿀벌이 없어진다면 인류는 사년 안에 멸종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꿀벌의 수분활동이 식물의 성장에 절대적임에 근거한 주장이다.

얼마 전부터 꿀벌들의 실종이 세계도처에서 자주 보고되고 있다. 너무도 중요한 현상이기에 과학자들은 이를 CCD(colony collapse disorder)라 명하고 그 원인에 주목하여왔다.

현재까지의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꿀벌이 사라진 주된 원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전자파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도 흔한 휴대전화의 전자파가 자기 집을 찾아가는 꿀벌의 본능을 훼손하여 실종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그리 매력적이지 못함에도 휴대전화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필자는 학생들에게 휴대전화를 버리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휴대전화를 버리면 처음엔 다소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문명의 이기에 의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며, 진정한 의사소통을 복원할 수 있다’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절약한 통신비를 모아 특정 사회복지 사업을 후원한다면, 우리의 의사소통은 보다 확대되어 그 지평을 넓히며, 동시에 보다 넓은 우리와 깊이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그럴듯한 꼬드김도 있었다. 당시 그다지 큰 호응은 없었고, 이내 나도 시들해졌었다. 그러나 최근 휴대전화의 사용에 따른 전자파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예전의 그 제안이 다시금 유효한 설득력을 갖는다.

만일 휴대폰을 버리는 과감한 결행이 어렵다면 그 사용이라도 자제하자. 그리고 그 절약된 만큼을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효한 방법인 사회복지 후원에 전용하기를 적극 권한다.

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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