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

작년까지 정부는 금융기관들을 위해서는 공적자금을 풀어서 부도를 막아 주었고, 소득에 비하여 부채규모가 비교적 적은 안정된 직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워크아웃, 배드뱅크 등의 신용회복지원제도를 통하여 부채의 굴레를 벗을 통로를 열어 주었다.

그러나 기초생활수급권자, 차상위계층, 실업자, 반실업자, 노숙자, 주부, 학생, 장애인, 노인 등과 같은 노동시장 소외자들과 소득에 비하여 부채가 과다한 생계형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대책은 없었다.

재경부의 조사에 의하면 기초생활보장 수급 신용불량자는 15만5천명이고, 이들의 1인당 평균 채무는 2 332만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천만원 이하의 소액부채자는 전체의 54%인 8만3천7백명으로 조사되었다. 기초생활보장법 제35조에 의하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받는 생계비와 부과급여는 어떤 채무자도 압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경부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전체 기초생활보장 수급 신용불량자 15만5천명의 42%인 6만5천백명은 정부에서 공적부조로 받은 급여로 채무상환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 대한 금융기관의 불법적 강제상환 독촉이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얼마나 금융기관의 불법적인 가혹한 채무독촉 행위를 방치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

시민단체들과 당사자들이 줄기차게 빈곤과 채권기관의 독촉으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생계형 채무의 탕감과 감면을 요구해왔으나 정부는 그 요구들을 묵살해왔다.

그러던 중에 IMF가 신불자 문제는 한국정부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간 신불자의 9%만이 해결되는 등 속도가 매우 느리며, 부채부담이 적고 소득이 안정적인 채무자들만을 신용회복지원의 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대책이 없음을 비판하고 대책을 요구하고 나서자,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신용불량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부채를 탕감해 주겠다고 예고했었다.

긴 예고기관을 거쳐 드디어 생계형 신용불량자 대책의 윤곽이 3월 23일 아침에 드러났는데,  한겨레, 서울, 문화, 매일경제 등의 조간신문에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의 부실채권을 자산관리공사로 하여금 장부가의 2% 정도로 매입하게 한 후 정부가 공적자금으로 대불해줄 것이라는 기사들이 났었다.

그러나 막상 오후에 발표된 최종안에는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이자는 감면해주나 원금은 수급을 벗어나면 그 때부터 장기분할 상환 하겠다는 것으로 그 내용이 바뀌었다.

이렇듯 예고된 안을 뒤엎고 탕감제도가 없어진 데는 불쌍한 생계형 신용불량자의 입장을 대변할 사람은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롭게 도입되는 제도에 의하면 수급자가 빈곤탈출 노력을 포기하고 평생 동안 정부의 보조에 의지하여 살면 원금상환을 무제한 연기해주지만, 빈곤을 탈출하는 순간부터 정부는 부채상환의 족쇄를 채워 다시 빈곤의 늪으로 끌어내리겠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처사는 외눈박이처럼 정부가 부채상환의 도덕적 해이만 보고 공적부조의 도덕적 해이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현행 제도 아래에서 일정한 소득이 없거나 소득에 비하여 부채가 과도하여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없는 생계형 신용불량자의 경우에 개인파산제도를 이용하여 면책 받고 재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실제로 법원에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람의 90% 이상이 면책을 통하여 부채를 탕감 받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새삼스럽게 나서서 "원금 탕감은 없다"고 부르짖으며 원금 완전변제를 요구하는 것은 공적부조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사법부가 시행하고 있는 개인파산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신용대란 사태를 불러온 책임이 정부와 채권기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애써 외면하고 생계형 신용불량자들의 도덕적 해이만 외치고, 사법부의 면책을 통한 탕감정책까지 부정하는 듯한 발표를 서슴치 않는 정부야 말로 도덕적 해이의 장본인이 아닌가?

이 시점에서 정부가 나서서 먼저 해야 할 일은 금융기관에 공문을 보내서 기초생활보장법 제35조에 명시된 - 수급권자가 정부로부터 받는 공공부조에 대해서는 금융기관에서 압류할 수 없다는 조항 - 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불법독촉에 대해서는 강력한 벌칙을 가함으로써 생계형 신용불량자의 생존권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생계형 신용불량자가 파산신청을 한 후 면책선고를 받으려면 신청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변호사 선임료까지 합쳐서 150 ~ 200백만원이나 되고,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혼자 절차를 밟을 경우에도 다중채무자의 경우에 50 ~ 60만원이나 되는 비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돈이 없어서 파산신청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이 나라 생계형 신용불량자가 처한 현실이다.

정부가 빛좋은 개살구와 같은 생계형 신용불량자 대책을 홍보하고 시행하느라고 많은 행정비용을 들여 봤자, '불법적인 생계급여 뺏기'를 하지 않는 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부채를 상환할 여력이 없다.

만약에 최저생계를 유지하고도 돈이 남아서 빚을 갚을 여력이 있는 수급자가 있다면 그들은 불법수급자일 것인데,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제도는 엄격하게 시행되기 때문에 불법수급자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실효성도 없는 제도를 홍보하고 시행하는데 비용을 들일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파산제도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법원에서 요구하는 복잡한 법적 서류들을 변호사의 도움이 없이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민단체들을 지원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현행 파산법의 개정을 통해 생계형 신용불량자의 신청비용부담을 덜어주는 것 또한 시급하다. 

 

이경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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