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존(수원여자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 산성동복지회관 관장)

 부모님이 살고 계신 가리봉동 본가 근처에는 조그만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80년대 초, 내가 대학 다닐 무렵 장사를 시작했던 주인이 여전히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꽤 유서 깊은 가게이다.
가리봉동은 고향집을 떠나온 구로공단 직공들의 자취방 또는 변두리로 쫓긴 도시 빈민의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살림방이었다. 최근에는 외국인 이주 근로자의 코리언 드림의 둥지로 빈번히 언급된다. 그러기에 동네의 변천도 심했고, 인구 변동도 많았었다.

그러나 유독 그 구멍가게만은 터줏대감마냥 그곳을 지켜왔다. 물론 우리 부모님 역시 그 가게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가리봉동을 지켜온 토박이 수준이다. 시골에서 올라 와 처음으로 마련한 그 집에 문패를 단 이후, 비록 생활에 불편이 있을지언정 그 집을 당신들의 분신마냥 지키며 살아왔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해왔기에 구멍가게 아주머니와 우리 어머니의 교류는 그 내용도 다양하고 깊이까지 있다. 먹을 것을 나누는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부재 중 전월세 문의 대행 또는 며느리에게 현관열쇠 전달 등 비일상적인 대소사에 대해서도 협조가 빈번하다. 또한 가게 주인의 부재 시 임시 점원으로 변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오랜 연륜으로 그 어떤 일가보다 깊은 정이 있는 것이다.

아주머니와 어머니의 교류가 매우 긴밀함에도 나와 가게 집 아저씨와의 교류는 그저 서먹하기만 하다. 이따금 본가에 갈 때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지만, 그 집 아저씨와는 눈길마저 마주치지 않고 슬쩍 지나치기만 한다. 20여년 전 처음 가게를 시작할 무렵, 아저씨의 다소 무뚝뚝한 태도 그리고 당시 성인이 되어서 대접을 받으려는 내 건방으로 인해 아저씨와 나 사이는 속 시원히 인사를 튼 적도 없이 그렇게 서먹하게 20여 년을 지내온 것이다.

그렇다고 아저씨와 나 사이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술에 취한 나는 돈 한 푼 없이 택시를 타고 집 근처에 도착해서는 주저 없이 가게 집 아저씨에게로 가 택시비를 꾸곤 했었다. 그럼 아저씨는 전혀 싫은 기색 없이 그저 필요하다고 한 만큼의 돈을 꾸어줬었다. 심지어 담배까지도 외상으로 가져오곤 했었다. 형식적으로 친하지 않았지만 아저씨와 나 사이에 분명 따듯한 교류가 있었음을 지금도 확신할 수 있다.

대형 할인점에 간다. 깔끔한 제복의 직원이 친절하게 맞아준다. 일면식이 없음에도 그 직원은 마치 나를 잘 아는 듯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찌 생각하면 구매를 통한 내 행복이 그의 지상 과제인 듯 너무도 친절하다.

먼지 투성으로 진열대에서 내던져 있는 구멍가게의 물건과는 달리 모든 물건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거의 없는 물건이 없으며, 대부분 신뢰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또한 구멍가게에서와 같이 가격관련 마찰도 거의 없다. 가격흥정이란 까다로운 절차는 전혀 없으며, 그저 쇼핑 이후 한꺼번에 돈만 지불하면 된다. 이외에도 굳이 장 보따리를 들고 끙끙거리며 집으로 갈 필요도 없다. 쇼핑한 물건을 카트에 싣고 넓은 주차장으로 가 자신의 차에 싣고 집으로 향하면 된다.

규모의 경제로 인한 상호 이익 그리고 이용의 편리함 등 너무도 대단하다. 그런데 대형 할인점을 갈 때마다 난 구멍가게 아저씨의 무뚝뚝한 얼굴이 겹쳐지며 다소 허전함을 느낀다. 소규모 자영업자의 생존권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구멍가게 주인과 나 사이가 비록 흉금을 터놓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집안의 내밀한 부분까지 대강을 알며 서로의 애로사항을 도와주었던 그 교류가 과연 대형 할인점에 여전하게 있는 지에 대한 회의와 허전함이다. 구매만을 강요하는 대형마트 직원들의 친절이 뻔뻔하게 느껴지고 상거래의 날카로움만이 번뜩일 뿐이다.

예전 동네 구멍가게는 단지 일상용품만을 사고파는 상거래의 장소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삶의 그대로 응축된 우리 삶의 주요 일부였다. 내가 사는 곳의 구멍가게로 인해 내 삶이 구체화되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는 자기 집 인근의 구멍가게로 인해 그 삶이 분명 나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다소 과장하면, 대형할인점에 의해 사는 모습들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주변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구멍가게 아저씨, 아주머니로 상징되는 인간과의 직접적 교류를 가지지 못한다. 무슨 마트니 무슨 쇼핑이니 하는 거대 유통자본과의 교류만이 차갑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난 우리 주변의 구멍가게가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에서 생활의 편의를 느끼기보다는 우리네 삶에서 점차 인간과의 일상적 교류가 사라짐을 아쉬워한다.

구멍가게를 지키고자 함은 영세 자영업자의 생존권을 보호하자는 온정적 주장만이 아니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워지는 삶의 모습이 예전 구멍가게를 통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 왔기에 이를 지키자는 안타까운 요구인 것이다. 구멍가게는 분명 우리의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윤미 기자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