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고음이나 강렬한 락 음악처럼 세월을 내딛는 음악이 있는가하면 시절을 공감하며 정서를 다독이는 음악이 있다. 무려 1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지난 시절과 젊음을 연주한 백발의 악사들, 그린실버밴드가 엮는 황혼의 무대를 만나보자.

그린실버밴드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지난 9일 오전 11시. 서울 구로노인종합복지관(관장 정길용) 대강당에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60~70대 노인들로 구성된 악대가 세월에 묻힌 옛 가요부터 최신 유행가를 연주하면 남녀노소가 어우러진 관객 200여 명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쳤다. 악대의 손놀림은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고 관객들의 어깨춤을 절로 자아냈다. 강당은 나이를 잊은 노년들의 열정으로 생기가 넘쳤다.
밴드의 연주가 듣고 싶어 매주 수요일마다 기관을 찾는다는 고종태(81)씨는 “저들은 마치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연주처럼 완벽하다”며 “연주에 맞춰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나이를 잊는다”고 전했다.

스크린까지 장악하다
지난 1997년 11월에 창단된 그린실버밴드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이수철 단장(75)을 비롯해 베이스기타 이경호(68), 기타 황운현(68), 색소폰 이차석(73), 트럼펫 송학봉(68), 드럼 이규채(61) 등의 노인 6명으로 구성돼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생활 할 때부터 노인악단을 만들고자 결심했던 이수철 단장이 실력 있는 연주가들을 불러 모은 것을 시초로 밴드가 창단됐다.
1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지역행사 및 공연과 양로원, 고아원,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행사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등 공식적인 활동만 100여개가 넘는 다는 이들은 실버문화에 대한 인식이 열악하던 과거에 등장해 주요 방송은 물론 영화에도 출연하며 입지를 굳혔다.
배우 박중훈이 출연한 영화 ‘불후의 명작’에서는 밴드전원이 악단으로, 배우 문성근이 주연인 영화 ‘아버지’에서는 이수철 단장이 시각장애 아코디언 악사로 출연했다.
이 단장은 “2000년까지만 해도 일주일 내내 행사가 생겨 정신없이 다니기도 했다”며 “지금은 그 때보단 한가하지만 한 달에 서너 번 주기적으로 행사 초청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린실버밴드는 흘러간 옛 가요에서부터 최신 가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주한다. 다만 특수한 행사가 생길 시에는 장소나 특성을 고려해 연주곡을 선정한다. 이를테면 광복절에는 ‘가거라. 삼팔선’과 같은 그 시절 유행가를, 마로니에 공원과 같이 젊은 층이 많이 찾는 공간에서는 가수 이정현의 ‘와’를 연주한다.

新오빠밴드, 팬레터도 받아
구로노인종합복지관 2층 회의실에 그린실버밴드 단원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모두 중년을 훨씬 넘긴, ‘할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기운이 감돌았다. 길게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악기를 다뤄왔다는 이들은 스스로 프로임을 자부했다.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하모니카를 접하면서 음악을 시작한 이수철 단장은 기동성과 함께 향수를 간직한 악기를 찾던 중 아코디언을 배우게 되었다. 지난 20여 년 간 아코디언을 연주해 온 이 단장은 피아노와 기타 실력도 수준급이다. 베이스기타를 맡고 있는 이경호씨와 기타를 맡은 황운현씨는 지난 60년대 밤무대를 주름잡던 기타리스트였다. 트럼펫을 맡고 있는 송학봉씨 역시 십대 때부터 악기를 다루었다. 송씨는 “악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트럼펫을 시작한 14살부터 지금까지 트럼펫을 불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당당히 밝혔다.
젊은 시절부터 악기를 다루었던 이들은 인기도 높다. 베이스기타 이경호(68)씨는 고교시절 만난 자신의 팬과 결혼했다. 이씨는 “젊은 시절 기타리스트 남편에게 생기는 여성 팬들 때문에 아내가 속을 좀 썩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60대까지 팬레터가 끊이지 않았다는 이수철 단장은 “곱게 장식한 팬레터를 받을 때면 기분이 어찌나 설레던지. 사실 부인이 알면 섭섭해 할까봐 불안하기도 했다”며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현재는 밴드 최연소자인 이규채(61)씨가 할머니들에게 팬레터를 받는 최고의 인기 스타라고.
이씨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는 가장 고령자인 반면, 이곳 그린 실버밴드에서만은 ‘아기’로 통한다. 선배 단원들은 뒤늦게 밴드에 합류한 늦둥이 악사 이씨를 “넉살 좋고 사람이 좋아서 지적이나 충고를 들어도 금방 알아듣고 기분 좋게 임한다”며 칭찬했다. 이에 이씨는 “단원들이 서로 격려하며 다독여주는 덕분에 밴드의 연주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렇듯 단원들 모두는 실력에 보태어 서로 간에 호흡이 척척 맞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관객과 함께 만드는 젊음
현재 그린실버밴드는 구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노래교실을 열고 양로원과 경로당 등을 찾아다니며 무료 위문 공연을 한다.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이나 축제가 한창인 10월에는 가장 바쁘다.
이수철 단장은 “우리 연주를 들으면서 눈물을 훔치는 노인들이 많다”면서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밴드활동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밴드활동 이외에도 단원들은 저마다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수철 단장은 블로그 카페를 직접 운영하며 연주영상을 제작해 네티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송학봉씨는 실버라이브카페와 노인기관에서 봉사연주를 하고 있다.
젊은 시절 자신의 기타연주곡을 담아 음반을 제작하기도 한 황운현씨는 지역방송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황씨는 “악기는 또 하나의 기술직”이라며 “나이가 들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데에 삶의 자신감과 의욕이 생긴다”고 전했다. 외모로 보나 내향으로 보나 또래보다 십년 가까이 젊게 사는 그를 주변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한다고. 그린실버밴드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활력소는 음악을 하며 관객들과 호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경호씨는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올 때면 정말 짜릿하다”며 “지난 일본공연에서는 악단 전원이 초청을 받아 교포를 대상으로 연주를 선보였는데, 당시 연주를 감상하던 교포들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덧붙여 “악기를 통해 취미생활도 할 수 있고, 자신감도 생기며 소일거리로 돈도 벌 수 있어서 일석이조(웃음)”라고 말했다. 이차석씨는 “음악에는 나이제한이 없다”며 “노인들이 즐길 수 있는 여가거리로 가장 손색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규채씨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노년의 생활에 밴드활동은 또 하나의 활력소”라고 덧붙였다. 송학봉씨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봉사활동까지 할 수 있어 기쁘다”면서 밴드활동을 할 수 있게끔 지원을 아끼지 않는 복지관측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도 그린실버밴드는 복지시설과 소외지역노인들을 위해 꾸준히 연주할 계획이다. 음악을 통해 이웃에게 봉사하며 노년을 즐기는 그린실버밴드의 활약이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길 바란다.

2008년 일본 공연 당시

배샛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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