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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민들레, 박길연 교장
박선미 기자 | 승인 2014.04.30 09:37

삶과 이웃 _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간학교 교장

이른 봄 들판의 언저리, 시멘트 벽돌 틈 사이에 따스한 햇살 받을 수 있는 곳이면 노란 꽃으로 피어나는 민들레. 능청스럽게 불어대는 봄바람에 흔들리고, 무관심한 발걸음에 밟히기도 하지만 어느새 우리가 모르는 사이 세상의 수많은 민들레들은 제 몸을 일으켜 세상에 환한 얼굴을 드러낸다. 자신의 뿌리를 믿고 장애를 받아들이면서 흔들리되, 흔들리지 않는 민들레가 된 박길연 교장. 학생들이 웃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의 얼굴에 진심이 묻어난다. 

 
중도장애인 된 후 장애 받아들이기까지
1990년. 결혼 후 류마티스관절염이 발병한 박길연 교장은 언젠가 치유되면 바로 걷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자신을 병이 걸린 ‘환자’로 여겼지, ‘장애인’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없었다. 동네에서 본 뇌병변 장애인 두어 명이 고작일 정도로 장애인의 사회활동이 부족했던 때였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박길연 교장은 장애를 입기 이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병은 서서히 계속 진행되었고 언제든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복지카드를 발급받은 것도 2002년이었다. 
형제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던 세월이었다. 몸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었고, 도움을 청하는 아이에게 엄마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2006년 한 장애인단체의 실무자를 알게 되면서 장애계 쪽에 발을 딛게 되었다. 직책을 부여받은 뒤 인천지역 장애인활동지원제도 마련을 위한 장외활동을 시작했고, 열정적으로 활동에 매달렸다.
“병이 진행성이다 보니 언제 와상장애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절실하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저 자신을 위해서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교육 배제된 장애인의 삶 충격…‘장애인야학’ 시작
어느 날 박길연 교장은 약속이 있어 뇌병변장애인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친구는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그 친구가 글 읽을 줄 몰라 제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없었던 것. 장애인이 기본 교육을 못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 교장의 충격은 컸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의 실무자로부터 장애인의 현실을 설명을 듣고 장애인의 삶에 다시금 눈을 뜨게 됐다. 장애인활동보조에 국한되었던 관심은 장애인교육으로까지 확대됐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한글 기본교육이 이뤄졌지만, 집주인은 이들의 모습을 반기지 않았다. 장애인야학을 해 보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공간 마련을 위해 휠체어를 끌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알아본 곳 모두 퇴짜를 맞고 겨우 알아본 한 오피스텔에서 2006년 9월 민들레장애인야간학교가 처음 문을 열었다.
시작은 했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야학을 벗어나 생계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눈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몸이 아픈 고통만 있었지, 경제적인 어려움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노점’은 창피한 일이라 생각했었어요.”
박 교장은 보행이 가능했던 장애인 친구와 함께 밤새 커다란 사탕과 껌을 모아 포장하고 나면 손에 통증이 몰려왔고 퉁퉁 붓기 일쑤였다. 활동보조인도 없었던 때라 중증장애인 둘이서 갈산역에 밤사이 만들어놓은 사탕꾸러미를 풀어 장사를 시작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박 교장 뿐이어서 다른 장애인들은 모두 그만 쳐다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자존심은 뭉개졌다.
“그 때 한 분이 3000원하는 껌을 5000원에 사주셔서, 그 마음에 용기가 나서 웃으면서 소리도 치면서 일했습니다.”
그렇게 20일이 흐르자 박 교장은 또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장애인 교육을 위해 공간을 마련했는데 정작 하루도 이 공간을 활용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그는 다시 야학 활성화를 위해 애를 썼다. 민들레야학에 모인 장애인들은 하나같이 중증이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활동도 생활마저도 힘들었다. 하지만 손을 쓸 수 없으면 발을 써서라도 더 심한 장애를 가진 동료를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주고, 방패막이 되면서 그 시절을 보냈다. 
“우리들 스스로가 민들레가 어울릴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어요. 실무자, 당사자 모두 상처입고 피나는 고생을 해야 했지요.”

 

온전한 권리행사 위해 장애인 스스로 ‘힘’키워야
야학이 자리 잡자 이제야 주변에 눈이 뜨이고 고향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다는 박 교장.
“저 스스로가 당당해지니까 친구도 만나게 되었죠. 누군가 만나는 것을 어려워했지만, 지금은 거절 안합니다. 변한 건 내 몸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활동을 몇 년간 지속하게 되었을 때도 장애인으로서의 권리를 말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아프고 힘든 것을 표현 못하는 성격이어서 혼자 고민을 끌어안다가도 야학의 학생들을 보면 잊혀지곤 했다. 야학의 학생들의 70~80%는 시설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장애인들이었다. 누군가가 정해준대로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욕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자립생활을 시작한 이들이었다.
장기간 지역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학생들은 야학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실시해도 자신감이 부족했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박 교장은 수시로 ‘당당하라’고 말하지만, 한 편으로는 남들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어려움을 십 분 이해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어려움을 감내하고 자신의 의견을 남 앞에서 표출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당해야만 살아갈 수 있어요. 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법과 제도가 만들어진 겁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장애인들 스스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에 전반에 있어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수 받지 못한 장애인들은 자립생활 이후에도 계속해서 교육과 훈련이 이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장애인야학의 교육방향이 기본교육에 치중해 왔다면 앞으로는 장애인 당사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추가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교육과 제도의 뒷받침과 더불어 그는 ‘장애인 인권활동’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애 관련 활동에 소극적인 장애인들에게, 또 중도 장애를 입어 심리적인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박길연 교장은 굳센 어조로 말한다.  
“내게 힘든 게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고민 속에 빠질 이유가 없어요. 앞으로의 정책들이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를 고민해야 되죠. 장애인들이 처한 문제에 맞서야 해요.”
수시로 찾아오는 신체의 고통은 기약이 없다. 뼈 마디마디가 굳고, 변형이 왔다. 활동 중간에 팔목이 꺾여 오른손은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 혈액순환의 불균형으로 하체는 몸이 차가워 항시 내복을 껴입어야 한다. 자신의 몸 하나 거누기 힘든 상황이지만 장애는 더 이상 그에게 한계를 긋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학생들이 웃을 때 너무 행복합니다. 장애인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역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글·사진/박선미 기자

박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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