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더불어사는사회 특집/기획
4․19혁명의 어제와 오늘역사 속 가치와 평가의 확고한 정립 필요할 때
김미선 기자 | 승인 2009.03.31 18:08

 

4·19혁명의 어제와 오늘

역사 속 가치와 평가의 확고한 정립 필요할 때

 

해마다 찾아오는 봄이건만, 4월의 햇살에는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총성소리에 맞서 자유를 외치는 함성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지던 그해의 4월. 이 땅에 자유와 민주의 씨앗을 뿌리고 스러져버린 그날의 봄이 아직도 눈부시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19일, 정의를 위해 일어났던 많은 학생들이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년에 이르렀다. 올해로 49주년을 맞아 반세기를 한 해 앞두고 있는 4·19혁명. 그들이 만들어낸 숭고함의 역사를 반추해보며 그 역사 속의 의의와 현재를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시대적 요구에 따른 필연성

1960년 발생한 4·19혁명은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에 의한 시대적 요구로부터 출발했다. 8·15해방과 분단 이후 성립된 1950년대의 우리나라는 미국의 원조정책 변화에 따른 경제적 위기와 자본주의 발전에 의한 사회적 분화,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억압적 지배경향과 민중의 궁핍화현상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처음 항거가 일어났다. 시내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張勉)박사의 선거 연설회를 진행하면서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부는 고교생인 어린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했고 학교 당국은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학원의 정치도구화에 반기를 들며 자주적으로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가난과 독재, 불의와 부정에 항거한 대구의 의거는 3·15부정선거로 인해 마산의 시위로 이어졌으며 이 때,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4월 11일, 마산 시위 때 실종되었던 김주열(당시 고등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마산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에 이어 19일에는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되었다. 이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한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를 진압해 총 186명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후,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 27개 대학 교수단 300여명이 국회까지 행진 시위를 벌이며 이승만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국민들의 계속되는 퇴진 요구에 이승만은 4.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4·19혁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비조직적이며 계급적 기반이 없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타도한 유례없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의 외신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지도자도 없는 한국의 묘한 학생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부가 새 모습을 갖출 때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것은 수개월을 요할 것이다.”라고 보도했을 정도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타도한 사건으로 3.1운동이 있은 지 40년 만에 우리 민족의 기개를 전 세계에 과시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4·19는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운 사건이자 비폭력 시민운동으로 이루어 낸 세계사적인 혁명이다.

 

우리나라 민주혁명의 효시

4·19혁명은 부정선거 규탄을 위해서 일어섰으나 3·15부정선거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 자유당 정권의 반민주적 · 반민족적 작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였다. 또한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국민을 무시한 주권행사, 반통일적 자세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정신을 계승·실천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자유와 민주, 통일이라는 4·19혁명 정신이 국가의 중요 이념이자 가치임을 공고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4·19혁명은 기본 이념 뿐만 아니라 과정과 결과 등의 고찰로도 그 의의가 대단히 크다. 먼저, 4·19혁명이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 과정에서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4·19혁명은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났다.

또한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4·19혁명은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19년 3.1독립운동과 19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으며 드골정부를 주저앉힌 프랑스의 학생운동과 미국 대륙을 휩쓴 대학생들의 베트남전 반대운동 등 세계 각국을 휩쓴 학생운동의 서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19 혁명의 지난했던 역사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기는 4·19후 오랫동안 빛을 잃은 것 같았다. 4·19혁명에 의해 수립된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탈취한 5·16 군사 쿠데타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5·16을 4·19의 계승이라고 주장하면서 4·19를 의거라고 규정, 4·19혁명의 가치를 절하하고 축소, 왜곡하는 우를 범했다. 또한 4·19이후 운동세력인 학생과 혁신정치 세력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냉대를 해왔으며 이는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30년 이상 지속되어왔다.

4·19가 35주년을 맞는 해에 비로소 ‘4·19혁명’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수유동 4·19 묘역이 국립묘지로 지정되어 민주화 성지로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

하지만 4·19민주혁명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는 “아직도 4·19혁명이 제 가치를 온건히 회복된 것이리라 보기 힘들다. 작년,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으로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에 4·19가 다시 학생운동, 의거로 폄하된 바, 또한 아직 많은 시민들의 인식도 여기에 미치지 않고 있는 듯하다.”고 말하며 헌법 규정을 뒷받침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 또한 미비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다시 세우는 4·19혁명의 정신

한편, 4.19관련 단체들은 헌법전문에 규정한 4.19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후세들에게 남길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전하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지난해 11월 30일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교과서 사태는 이들의 활동을 여실히 보여줬다. 문제의 발단은 교육과학기술부가 ‘4·19 혁명’을 ‘4·19 데모’로 폄하한 영상물 <기적의 역사>이 전국 초중고교에 배포하면서 불거졌다.

4ㆍ19민주혁명회와 4·19혁명희생자유족회 소속 회원들은 국무총리의 대국민 사과와 안병만 교과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으며 곧 정부가 잘못을 시인하고 동 CD를 회수하여 전량 폐기하는 등 4·19정신의 가치를 지켰다.

또한 외국의 민주화운동에도 지지를 더하며 힘을 보탰다. 4·19혁명단체는 미얀마의 군정 권력상층부의 무도한 정치행위에 미얀마 국민들이 항거하여 희생자가 돌출하고 있는 사태를 좌시하지 않고, 미얀마 국민의 민주화투쟁에 지지를 선언하며 주한 미얀마대사관을 항의방문하고 이에 따른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외에도 4·19정신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의 가슴속에 4·19혁명정신을 선양하고자 자발적인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07년 12월 해양 원유유출사고가 발생해 태안앞바다를 물들였을 때, 먼저 나서서 방제봉사활동을 기획, 실행하며 국민적 슬픔을 함께 나누고 피해로 인해 심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태안주민을 위로한 것들이 그러한 예이다. 앞으로의 계획도 구체적이다.

먼저, 4·19민주혁명회는 뜻을 함께 하는 4·19인들이 모여 4·19혁명 제50주년에 즈음, 4·19와 관련한 부정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을 할 예정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과거에 의해 창성된 현재의 4·19혁명 공법 3단체를 발전적으로 통합하여 4·19혁명 정체성을 확보하는 4·19혁명단체로 조직하고, 그 바탕에 ‘4·19혁명 기념사업재단’을 설립, 과거에 의해 축소 왜곡되었던 4·19이념을 바로 세우는 활동을 해나간다는 계획이다.

또한 4·19혁명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정의가 이 땅에 확고히 뿌리내리기 위한 정신적 구심점적 역할도 함께할 예정이다. 그 구심점에 (사)4월회가 눈에 띈다. 4.19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순수 비영리 민간단체 (사)4월회는 조찬토론회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내년에 있을 50주년을 기념하여 장학재단을 설립할 계획을 밝혔다. 또한 정치인이 참여하는 토론회 등도 준비 중이다.

(사)4월회는 또. 약 400여명의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구성되어 국회의 여야 인사가 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밝히며, 이와 관련해 4월회가 독자적으로 올바른 소리를 내고 나아갈 것을 밝혔다.

끝으로 4.19민주혁명회는 4·19혁명의 가치가 국가적으로 ‘계승할 가치”인 것을 헌법전문에 규정하였으면서도 이를 구체화하는 명백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없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일환으로 50주년 기념사업에 4·19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국제 석학들과 함께 조명하는 프로그램 제작과 ‘4·19혁명사’를 정리 편찬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이데올로기

역사는 늘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늘 현재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상호 소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4·19혁명에 관해서도 역사의 평가는 늘 재평가 되어왔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연 최초의 혁명인 점에서는 동의하면서도 축소, 은폐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혹자는 이러한 4·19혁명의 정신과 역사를 단절하고 왜곡하며 동기와 과정, 과거사적 몰인식의 배경으로 이어져온 국가 정책을 비판한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민주정치가 오랫동안 꽃을 피울 수 없었으며 국민의 역사의식에도 제약이 되어왔다고 말이다. 반면, 또 어떤 이는 4·19혁명으로 시작된 민주운동이 있었기에 지금의 민주화, 성숙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미래에 더 초점을 두기도 한다.

오늘에 이르러 중요한 것은 4·19혁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제 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자유·민주·정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불태웠던 그 날은 이제 머물러있는 역사가 아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라는 하나의 이념인 것이다.

그리하여 4·19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4월의 넋들이 외쳤던 애국충정과 민주이념의 참뜻을 가슴속에 새겨둘 일이다.

글/ 김미선 기자 사진 및 자료제공/4.19민주혁명회, 사단법인 4월회

 

김미선 기자  

<저작권자 © 복지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미선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영등포구 대림로 83 광진빌딩(대림동 990-44)  |  대표전화 : 02-847-8423  |  팩스 : 02-847-8424
등록번호 : 서울 다 05179  |  등록일 : 1996. 12. 10  |  발행·편집인 : 김종래  |  청소년 보호 책임자 : 조시훈
Copyright © 2020 복지뉴스.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